스리랑카 여행을 함께한 책
여행을 떠나기 전, 늘 그렇듯 목적지가 배경인 소설을 찾았다. 이번에는 챗GPT에 도움을 요청했다. 스리랑카가 배경인 소설 몇 권을 골라 간단한 소개를 곁들여 추천해 달라고. 그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바로 이 책이다.
<말리의 일곱 개의 달 The Seven Moons of Maali Almeida>
이 책은 스리랑카의 작가 셰한 카루나틸라카가 2020년 쓴 소설이다. 1989년 내전 중인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주인공 말리 알메이다가 깨어나며 시작한다. 전쟁터를 누비던 사진가이자 도박꾼이자 동성애자인 말리는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말리는 중간계(In Between)에서 영혼으로 정신이 들었다. 죽은 이들은 “빛“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일곱 개의 달(7일)만큼 시간이 주어진다.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파헤치기로 한다. 이 소설은 2인칭으로 쓰여있어서, 마치 내가 말리가 된 것처럼 이야기에 빠져들어간다. 말리가 되어 추리에서 액션으로, 다시 판타지에서 역사 느와르로 여러 장르를 넘나든다.
스리랑카의 내전
(또) 영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된 싱할라족과 소수 민족인 타밀족 간의 갈등이 1948년 독립한 이후로 더욱 심화했다. 70년대에는 타밀 독립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타밀 급진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라는 반정부 단체가 생겨났다. 1983년, 이 단체와 스리랑카 정부군 사이에 충돌이 생겨나며 전국적으로 타밀인을 학살하는 일이 생긴다.
소설에서는 그렇게 1983년 시작되어 2009년까지 이어진 실제 스리랑카 내전 중 가장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시기인 1989년을 배경으로 한다. 정부군, LTTE 그리고 인도 평화유지군(이라고 쓰고 학살 군이라고 읽는다), 마르크스계 반체제 그룹인 JVP 등등 다양한 세력이 들어와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기자, 학생 가릴 것 없이 실종, 납치되고 고문당하고 암살당하는 일들이 허다했다.
말리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사진 찍는 일을 받았다. 정부군을 위해 사진을 찍기도 했고, 외신을 위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전쟁터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끔찍하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눈으로, 카메라로 담고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일의 증인이 된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말리는 그런 이유로 누군가에 살해당한 것일까?
죽기 직전의 기억을 잃어버린 말리는 중간계에서 일곱 밤을 보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 와중에 회상하는 자기의 삶이 꽤 흥미롭다. 부재했던 아버지, 미워했던 어머니, 말리를 사랑한 친구와 말리가 사랑한 친구, 말리에게 일을 의뢰했던 사람들과 도움을 준 사람들. 중간계에서 만나는 다른 영혼들의 이야기도 스리랑카의 역사를 --특히 내전을-- 잘 보여준다.
이런 시대에 빠질 수 없는 것은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나라나 정치인들에 대한 인식은 비슷한 걸까. 과거 민주화 운동부터 작년 내란사태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이 겹쳐 보이는 구절들이 많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악이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피조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Evil is not what we should fear. Creatures with power acting in their own interest; that is what should make us shudder.
당신은 모든 신화 속 존재 중 가장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바로 정직한 정치인.
You are thinking of that most impossible of all mythical creatures: the Honest Politician.
선과 악의 싸움이 왜 그렇게 일방적인지 아세요, 말린?
악이 더 잘 조직되고, 더 잘 장비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괴물이나 야카, 악마가 아닙니다.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조직화된 악행의 집단이죠.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죠.
You know why the battle of good vs evil is so one-sided, Malin? Because evil is better organised, better equipped and better paid. It is not monsters or yakas or demons we should fear. Organised collectives of evil doers who think they are performing the work of the righteous. That is what should make us shudder.
혼란한 시대에 사후세계를 다루는 책이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스리랑카의 국교는 불교다. 인구의 70%를 구성하는 싱할라족은 대부분 불교이고, 타밀족은 힌두교, 그리고 나머지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인들이 있다고 한다. 정작 말리는 무신론자이지만, 이 책 속의 사후세계도 여러 종교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지금의 삶과 이다음의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따라 다른 결정을 하게 될 것 같아 흥미로웠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세상을 용서하는 것, 내가 용서받는 것, 그리고 가장 자신이 속한 곳으로 가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원서로 읽었는데, 중간중간 나오는 싱할라 혹은 타밀어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조금 아쉬웠다. (Putha, Mali 등) 소설로 역사를 조금은 엿볼 수 있어 좋았지만, 반대로 역사를 알고 읽었다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소설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평화롭게 여행했던 곳들도 이런 아픔이 있었던 곳이라 생각하니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만난 이들의 과거에도 말리의 이야기와 맞닿는 것들이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