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책은 추억을 싣고

by Sun
darwin-vegher-W_ZYCEUapF0-unsplash.jpg Photo by Darwin Vegher on Unsplash


대학 시절 한 여름방학이었다. 한국에서 방학을 보냈는데, 며칠 시간을 내어 서울에 갔다. 교수님과 또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들과 한국외대 근처에서 만났다. 우리 목적지는 외대 앞에 있는 헌책방이었다.


교수님은 아마도 경제학 관련 서적을 눈여겨보고 계셨을 테고, 나머지는 각자 자기가 관심 있는 책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내 눈을 끌었던 책은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었다.


IMG_1556.jpg 이병률 시인의 <끌림>


이 책을 좋아해 여러 번 읽었고 소장하고 있던 책이라 이 책이 헌책방에 와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누군가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직 다른 사람들은 책을 구경하고 있었고, 이 책을 한 번 더 보면서 시간이나 때우자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얀 책표지는 어디로 갔는지 어두운 책등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있었다. 책을 꺼내어 펼치자 누군가 빨간색 펜으로 적은 메모가 보였다. 책장을 넘기자 페이지마다 빨간색 메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아니 누가 이런 상태의 책을 헌책방에 판다는 말인가. 지금 알라딘 중고서점 같은 곳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을 정도였다. 시인이 쓴 산문집에 메모라니,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읽어보니 이 메모는 모두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였다.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때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은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었다.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멋진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가 떠올랐는지 자신의 경험담, 상대를 향한 질문, 다짐 등을 적어두었다. 술 취해 쓴 싸이월드의 일기를 다음날 맨 정신에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오글거리는 말들이 가득했다. 낄낄거리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책의 사연은 무엇일까? 마음을 빼곡히 담았지만 전달할 수 없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헌책방으로 보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책으로 고백에 성공했지만 결국 헤어진 후 추억과 함께 버려진 것일까?


예쁜 글씨도 아니었고, 예쁜 색으로 쓰인 메모도 아니었으며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었지만 그 책을 구입했다. 낙서로 가득한 책이라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그 책을 오래 가지고 있다가 국제이사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넘겨주었다. 헌 책에 담긴 추억도 함께.


그 후로 가끔 헌책방에 간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 홍콩 후미진 골목에 있는 헌책방에 누군가 남긴 추억을 찾아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르셀로나는 가우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