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 노인과 베트남 쌀국수

다낭 여행을 함께한 책

by Sun

아침 일찍 다낭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내려두고 근처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첫 식사는 Pho, 베트남 쌀국수다. 이 한 그릇을 보며 비행기에서 읽던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호텔 근처에서 먹은 첫 쌀국수


베트남의 심장부인 하노이에서 천년의 중국 점령기 이후 전역을 풍미한 쌀국수와 쟁기질을 하던 소를 스테이크(biftech)와 포토뵈(pot-au-feu)로 바꾼 프랑스인들 치하에 배운 소고기의 맛을 합친 이 음식에 베트남의 역사가 담겨있다. 오래전 헝의 삼촌 첸이 설명했듯이 그 국민음식의 이름은 불이라는 프랑스 단어처럼 발음된다.

The history of Vietnam lies in this bowl, for it is in Hanoi, the Vietnamese heart, that pho was born, a combination of the rice noodles that predominated after a thousand years of Chinese occupation and the taste for beef the Vietnamese acquired under the French, who turned their cows away from plows and into biftech and pot-au-feu. The name of their national soup is pronounced like this French word for fire, as Hung's uncle Chien explained to him long ago.

Camilla Gibb <The Beauty of Humanity Movement> 중


아무 준비도, 계획도, 조사도 없이 와서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따뜻한 쌀국수 한 그릇을 보면서 여기 담긴 베트남 역사에 대해 생각했다.


건설현장 감독은 모든 엄마들이 아이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젓가락을 그릇 바닥으로 밀어 넣고, 국수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물결을 만들어 허브를 바닥으로 가라앉힌 후, 허브가 떠오르기 전 국수를 국물에 적신다.

... The foreman thrusts those chopsticks to the bottom of the bowl and lifts the noodles into the air, creating a wave that plunges the herbs to the bottom before they float back to the surface, infusing the noodles in the broth, just as every mother teaches her child.

Camilla Gibb <The Beauty of Humanity Movement> 중


헝 노인은 장인답게 손님이 내민 그릇에 오른손으로 능숙하게 쌀국수를 담고, 얇게 썬 설익은 소고기로 그 위를 덮는 동시에 왼손으로 따른 뜨거운 육수에 고기가 익게 했다. 내가 주문한 쌀국수도 이렇게 준비됐을까. 따뜻한 국물에 소고기가 익어갈 때쯤 한 젓가락 집어 들어 맛본다. 홍콩에서 맛보던 쌀국수보다 향이 세지 않다. 아, 따로 나온 허브를 따로 넣지 않았구나. 책에서 읽은 대로 베트남 엄마에게서 아이들로 전해져 온다는 쌀국수 먹는 법을 괜히 흉내 내 본다.




2019년 여름, 일상에 지친 어느 날이었다. 친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덜컥 베트남 여행을 가기로 했다. 셋 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고, 각자 휴가 일정도 달라서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결국 S의 일정 조정이 어려워 흐지부지 됐다가 막판에 시간이 맞은 K와 둘이서 베트남 다낭에 다녀오게 되었다.


K가 사는 곳에서는 다낭까지 직항이 없어서 고생하며 와야 했다. 나는 그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조금 늦게 떠나는 일정으로 호텔만 예약해뒀었다. 별다른 준비물은 없었다. 옷 세벌, 수영복, 선글라스, 그리고 늘 그렇듯 여행지와 관련된 소설이 담긴 킨들.


베트남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찾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이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물론 그중에도 좋은 소설도 있지만, 조금 더 잔잔한 내용의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러다 어떤 블로그를 통해 발견한 책 카밀라 깁Camilla Gibb의 <뷰티 오브 휴머니티 무브먼트The Beauty of Humanity Movement>를 선택했다. 베트남 현대사를 겪어온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베트남 역사에 대해 알고 읽으면 조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배경지식이 전혀 없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어로는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Cover image from Amazon.com

이 책은 평생 쌀국수를 만들며 살아온 노인 헝Hung과 베트남계 미국인인 매기Maggie, 여행가이드 뚜Tu의 이야기다.


시골에서 태어난 헝은 열한 살 무렵 하노이에서 쌀국수 장사를 하는 삼촌에게 보내졌다. 삼촌의 가게에서 쌀국수 장사를 돕다가 가게를 상속받고, 장사를 이어나간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그리고 베트남 전쟁 초기 가게는 애국심 가득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아침을 먹고 토론을 하는 장소가 된다. 프랑스로부터의 독립과 공산당의 집권, 그리고 전쟁을 겪는 동안 헝 노인은 가게를 잃었지만 카트를 만들어 끌고 다니며 몇십 년 째 아침마다 (제일 맛있는) 쌀국수를 판다.


큐레이터인 매기는 베트남 전쟁 때 사이공(현 호치민시티)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가 자란 비엣키우(Viet Kieu,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을 떠나야 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함께 미국으로 떠나지 못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베트남으로 돌아왔고, 그 과정에서 헝 노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헝 노인에게는 아들과 같은 빙Bihn, 그리고 그의 아들 뚜Tu가 있다. 그들은 여전히 아침마다 헝 노인의 카트를 찾아 아침을 먹는다. 뚜는 학교 선생님을 하다 그만두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투어 가이드가 되었다. 뚜는 보통의 베트남 젊은이와 다른 비엣키우를 만나 그녀의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일을 돕는다.




여유가 넘치는 다낭의 백사장

K와의 베트남 여행은 즐거웠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걷고 눕고 읽고 수영하는 일을 반복했다. 나이가 들수록 여행의 목적지보다 여행의 동반자가 더욱 중요해진다.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에 가든 좋다. 함께 여행하던 친구처럼, 그때 읽고 있던 책처럼 내가 본 베트남은 여유롭고 생기 넘쳤다. 다낭 시내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보는 현지의 모습이 늘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현지인들 사이에서 헝 노인, 뚜 그리고 매기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저 사람에게도 내가 모르는 과거가, 사연이, 경험이 있겠지 생각하며.


베트남에서 먹은 분짜와 마지막 식사 햄버거

여행을 하며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다. 하루에 한 끼는 쌀국수를 먹었던 것 같다. 산에 올라 먹었던 분짜도, 해산물 식당에서 먹은 저녁도, 시내 어디선가 먹은 피자도 맛있었다. K가 먼저 떠나고 시간이 남았던 나는 해변 근처에 있는 맛집을 찾았다. 꽤나 높은 점수를 받은 햄버거 가게였다. 베트남에서 마지막 식사를 햄버거로 마무리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햄버거는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여러 음식 중에서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서 가장 많이 생각난 음식은 쌀국수였다. 따뜻하고 담백한 쌀국수. 이번에 다시 책을 읽으며 궁금해졌다. 하노이에서 제일 맛있다는 헝 노인의 쌀국수는 어떤 맛일까?


(헝의) 쌀국수 한 그릇은 심지어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중요한 영양공급원이면서 아침에 일어나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A bowl of pho can offer critical sustenance and a reason to get up in the morning, even in the most troubling of times.

Camilla Gibb <The Beauty of Humanity Movement> 중


IMG_9823.jpg 아주 기본적인 형태의 하노이식일까? 아니면 화려한 사이공식일까?



*한국어 번역은 발로 해서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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