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의 피렌체

by Sun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피렌체라고 답할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향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 도착해서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엔비를 찾았다. 기차역에서 꽤 가까운 곳이었다. 짐을 끌고 골목길을 걸으며 이미 피렌체가 마음에 쏙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에 도착해 집주인인 페르난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큰 이모뻘인 페르난다는 피렌체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페르난다는 피렌체 지도를 펼쳐놓고 도시를 어떻게 구경하면 좋은지, 어디를 가면 좋은지 설명해주었다. 곧 짐을 풀고 집을 나섰다.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본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베네치아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르노 강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 그리고 날씨까지 모두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잠시 강가 난간에 기대어 카누를 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피렌체 여행을 위해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피렌체는 준세이와 아오이의 도시였으니까.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장소.
언젠가 나와 함께 올라가 줄래?
조토의 종탑에서 바라본 두오모 쿠폴라

아오이의 이 대사로 시작하는 영화는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두오모와 종탑을 지나 오래된 골목을 누비는 준세이, 복원한 작품들이 걸려있는 우피치 미술관, 아르노 강을 건너는 다리, 그 위에 추억을 덧입혀서.

쿠폴라에서 바라본 종탑

하루는 조토의 종탑에 올라 두오모 쿠폴라를 보고, 또 하루는 쿠폴라에 올라 종탑을 보았다. 쿠폴라에 오르는 길은 꽤나 힘들어서 다 오른 후에 아오이처럼 그렇게 예뻐 보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피렌체 어디서나 보이는 이 쿠폴라 꼭대기에 올랐을 때, 꼭 준세이와 아오이가 만났을 때처럼 종이 울렸다. 피렌체 시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영화 속 조반나가 피렌체를 떠나며 준세이에게 이야기한다. 이 도시는 점점 낡아가고 있다고. 아무리 지키고 복원을 해도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피렌체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 살고 있다고. 과거에서 전해오는 것들을 지키고 복원하는 일을 하거나 관광업에 종사하니까. 피렌체 사람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골목마다, 건물마다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이 도시에 매력을 더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를 지키려는 그 노력 덕분에 나는 여기에 눌러앉고 싶을 정도로 피렌체에 빠졌다.




피렌체의 또 다른 매력은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한 르네상스의 유산이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피렌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역사책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뽑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모두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책에서만 보던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했던 우피치 미술관은 메디치 가문의 건물이었다. 모든 예술품을 상속받은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가 모든 것을 피렌체에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토스카나 정부에 기증했다고 한다. 나는 우피치 미술관을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속성으로 둘러보았지만 한나절이 걸렸다. 이탈리아행 비행기에서 읽었던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책 덕분에 그림이나 조각상들을 피렌체와 조금 더 연결해서 볼 수 있었다.


해 질 녘 저녁을 먹은 후 레푸블리카 광장을 걸었다. 노을이 분홍빛 하늘을 만들고, 회전목마에는 불이 들어왔다. 그 앞에는 두 사람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기타를, 또 다른 사람은 키보드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여러 나라의 유행곡을 불렀는데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을 들었다. 다른 이들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 순간, 그곳이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곳이 되었다. 짧은 영상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키보드를 치던 그 가수가 댓글을 남겼다. 이틀 뒤 베키오 다리에서 다음 공연이 있을 예정이라고. 그래서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포기하고 시간에 맞춰 일찍 베키오 다리로 돌아왔다. 아르노 강의 석양을 배경으로 멋진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그들의 음반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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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푸블리카 광장과 베키오 다리에서 만난 버스커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한참을 앉아 공연을 본 후 나는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으슬으슬한 몸을 이끌고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처음 먹어보는 따뜻한 스프를 주문해 먹었다. 그리고 다음 여정인 로마에서 조금 고생했지만, 그날 저녁은 내게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피렌체는 조그만 곳이지만 구석구석 돌아다니기에는 나흘도 모자랐다. 원래 중간에 피사에 하루 다녀오려던 생각도 있었지만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길바닥에 분필로 명화를 재현해 둔 사람들, 각종 악기를 들고 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 두오모 근처 어디선가 먹었던 칼조네, 미켈란젤로 언덕을 가던 길에 먹은 젤라토, 광장에 있는 카페에서 먹은 에스프레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에 가득 찬 크림과 향수... 피렌체를 다녀온 지 벌써 몇 년이나 내게는 여전히 로맨틱하고 따뜻하고 그리운 곳으로 남았다. 남겨두고 온 것도 없는데 꼭 다시 돌아가야만 할 것처럼 그리운 곳이다.


준세이와 아오이가 10년이 지난 약속을 기억해 피렌체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나도 언젠가 피렌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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