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선생님

by Sun

"저는 OO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멋진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파란 졸업가운과 학사모를 걸치고 마이크 앞에 서서 크게 말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한해 졸업생이 백 명도 되지 않던 작은 학교였고, 졸업식 때 모든 학생들이 강당 앞 무대로 나가 졸업장을 받고 자신의 꿈을 말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친구들의 장래희망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수, 바이올리니스트, 경찰 심지어 대통령 등등 다양한 직업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자라면서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모범생스러웠던 나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편이기도 했다. 물론 나이가 더 들면서 괜히 무섭거나 미운 선생님들도 있었고 훌륭하지 못한 인품을 가진 분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중학교 때 만난 담임선생님은 선생님이 되신 지 몇 년 안되신 분이셨다. 선생님은 정말 열정이 가득하셨다. 도덕 과목을 가르치셨는데, 왠지 선생님의 이미지와 과목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랄까. 선생님은 수업이나 성적 이외에도 학생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는 분이었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일기를 쓰게 했는데, 초등학교 방학숙제로 쓰던 그런 일기가 아니라, 내 관심사, 취미로 채울 수도 있고, 선생님에게 쓰는 편지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자유로운 형태의 일기였다. 선생님과 소통할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열심히 썼던 기억이 있다. 그 학년 초에 힘든 일이 있어서 새로운 학년, 새로운 반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좋은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금방 이겨낼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게 아닐까?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외에 인생에 중요한 것들은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시간이 더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느꼈던 그런 "낭만"을 찾기에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는 성적이 너무 중요했다.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는 어렸을 때와는 많이 다르기도 했고, 모든 학생들을 다 챙겨 성적 이외의 문제까지 신경 쓰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교사라는 직업 이외에도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결국 나는 선생님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 생각과는 크게 다른 길을 걸어 지금은 홍콩에서 9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입사한 지 3년 정도 됐을 때 회사에서 홍콩 지역 NGO와 연계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영어수업을 해주는 봉사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 늦은 오후에 학생 15-20명 정도가 오피스로 와서 수업을 받는다. 참가하는 봉사자는 6-10명 정도. 이 수업의 주목적은 영어 읽기, 말하기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아이들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주는 일이었다.


처음 이 봉사활동을 주도한 동료는 예전 국제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칼Carl이었다. 한 학기 10번의 수업 계획을 짜는 법, 수업 내 규칙을 만들고 적용하는 법, 수업의 목표가 아이들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일이라는 것, 소외되는 아이 없이 모두 함께 수업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법 등을 함께 봉사하는 동료들에게 알려주었다. 칼Carl은 우리의 교장선생님이었다. 그가 홍콩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계획, 자료 같은 것들을 나와 또 다른 동료에게 넘겨주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수업을 이끄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매주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보람찼다. 처음에는 수줍어하며 친구에게 광둥어로만 속삭이던 아이들이 영어로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더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때면 새로운 아이들이 온다. 가끔 전 학기에 다니던 학생 한두 명이 돌아올 때도 있는데, 그러면 그 학생들의 자신감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작년부터 중국의 소도시에 있는 초등학교에 원격 영어수업을 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작은 도시라 외국인 선생님도 없고, 기본적으로 외국인과 만나 이야기해볼 기회도 적다고 한다. 해당 학교 영어 선생님이 원격 수업 중간중간 통역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그런 도움이 없어도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걸 보면 참 대견하다. 점점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이 익숙해지고, 아이들도 내가 편해지기 시작할 때쯤 학기가 끝나버려 아쉽기도 하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렇게 어쩌다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가끔 선생님이 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 6개월 동안 10번의 수업, 아주 적은 시간이라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를 잊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얻은 자신감은 오래오래 그 아이들에게 남기를 바란다.


어쩌면 꿈을 이룬다는 건 꼭 그 직업을 내 이름과 함께 새긴 명함을 가지기보다는 그 본질을 경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OO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멋진 선생님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선생님이 되어 소소하게 꿈을 이루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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