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x 30, Oil on Canvas
아이들은 연필보다 크레용이나 색연필, 혹은 크레파스를 먼저 잡는다. 하얀 종이 위에 손이 가는 대로 줄을 긋거나 칠한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어른들이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자기는 무엇을 그렸는지 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모양이 잡히고, 색이 제대로 입혀진다. 계속 그림에 관심이 있는 아이도 있을 테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 그리고 별 관심 없는 아이도 있을 테다. 나는 그림에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관심이 있는 아이였다. 어쩌면 예체능 전반적으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재능은 없지만 모두 예술에 대한 동경과 관심은 있는 그런 아이.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덕에 학교를 마치면 여러 학원을 다녔다. 피아노도 배우고, 미술학원도 가고. 아무래도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시간을 때우려는 뜻이 더 컸겠지만, 피아노와 달리 미술학원은 꽤 즐겁게 다녔다. 몇 년 전 엄마가 내가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을 보내주셨다. 저런 그림을 그리면서 가끔 화가를 꿈꿨다는 게 우습지 않은가. 그래도 꿈은 꾸는 거다. 학원을 다니면서 꼭 저런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통일 포스터 대회가 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이 통일에 대해 생각하고 포스터까지 만들기에는 조금 벅찼다. 포스터라는 것은 응당 촌스러운 표어까지 함께 따라가야 하지 않나. 여덟 자인지 열여섯 자인지 가물가물 하지만 그럴듯한 표어도 적어 넣고, 학원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아 하얀 비둘기가 파란 바다 위에 떠있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멋진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은 교실 뒤 한가운데 걸렸다. 물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께서는 그게 순전히 내 실력이 아니라는 것도 꿰뚫어 보시고 내 그림을 대회에는 제출하지 않으셨지만 말이다. 그렇게 잠깐 스쳐간 화가의 꿈은 끝이 났다.
여전히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어떤 그림은 그 앞에 멈춰 서서 몇 시간이고 볼 수 있다. 유럽의 미술관에서, 다른 일정 없이 그냥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그림과 조각을 보고, 또 그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보는 게 즐겁다. 그리고 수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색을 입히면 진짜 옷 같은 저런 질감을 표현하는 걸까? 이건 누굴 보고 그린 걸까? 왜 어떤 그림은 덜 사실적인데도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저렇게 순간을 붙잡는 능력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미술 혹은 예술은 멀리 있지 않았다. 홍콩에는 해마다 아트 바젤Art Basel이나 Art Central등의 아트 페어가 해마다 열렸고, 꾸준히 그림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렇다고 미술에 대한 내 이해가 깊어졌다거나 한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해 친한 언니와 동생이 유화를 그리러 가자고 했다. 집 근처에 아트 스튜디오가 많은데 학생들이 다니는 수업도 있었지만 성인반도 있었다. 정식으로 배우는 거라기보다는 art jamming형식인데 그리고 싶은 사진이나 그림을 고르면 스튜디오에서 캔버스와 물감, 그리고 붓을 제공해준다. 내가 고른 사진이나 그림을 보고 캔버스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다. 보고 있는 그림과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이 그림을 감상할 사람은 내가 될 테니까 말이다. 밑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물감을 덜어온다. 어떤 색을 조합해서 색을 입힐지 고민이 될 때는 선생님이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배경부터, 어두운 색부터 채워나간다. 어떤 그림은 하루 세 시간 만에 완성이 될 때도 있고, 또 다른 그림은 여러 차례 나누어 갈 때도 있다.
내 손은 아직도 그다지 여물지 못해서 완성된 그림도 왠지 삐뚤빼뚤 어린 시절 그린 그런 그림 같다. 그래도 내가 고르고 내가 그린 그림이라 그런지 볼수록 마음에 든다. 좁은 집에 그림을 걸어둘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그림을 골라본다. 햇볕이 잘 드는 여름에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그린 그림을 거실에 걸어둬야지. 비가 오는 날에는 비 내리는 골목길 그림을 보며 책 읽기 딱이다. 밝게 달이 비치는 밤 호수를 그린 그림은 그릴 때도, 볼 때도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여행이 가고 싶을 때는 프랑스 빵집 앞 거리를 그린 그림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볼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도 한다.
요즘은 조그만 노트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그림일기를, 어느 날은 그냥 눈앞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 다시 여행을 가게 된다면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그 장소를, 그리고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멋진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한들 어떠한가. 순간을 담고, 느낌을 담고 또 기억을 담아 그린 그림이 내 노트에, 그리고 내 방에 걸려 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