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프로젝트 50 #31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에서 김훈 작가의 신작 <하얼빈>을 보았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 사건을 그린 내용이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을 그린 <칼의 노래>가 떠올랐다. 책 소개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작가의 말’의 한 문장이었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p.303
안중근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장본인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기차역에서 총으로 저격해 사살하고 ‘코레아 후라’를 외쳤다는 우리 민족의 영웅. 왼손 약지를 단지한 그의 손도장은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다. 법정에서 조선의군의 참모중장으로 적군의 수장을 처단한 것이라 말했던 그를 크고 강인하기만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이토를 사살했을 때 고작 31살이었다는 것을, 아직 얼굴을 보지도 못한 셋째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세례를 주었던 신부와 그 주교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를 하느님을 등진 사람 취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와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p.301-2 작가의 말
책은 안중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안중근의 내면에 집중한다. 말보다는 눈빛으로, 결심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이토의 영향을 우리 사회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그 결심, 결의에 찬 눈빛, 적장을 처단하는 것이 군인으로서 행해야 할 의무라고 믿는 믿음, 100 루블을 강제로 빌려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행동 같은 것들 말이다.
안중근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나 뮈텔 주교 등 하얼빈 의거와 연관된 이들의 행적과 그가 했을 법한 생각도 보여준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이 왜 그런 일들을 해야만 했는지, 그들 나름의 이유와 논리가 있었을 테고, 그게 어떤 것들인지 엿볼 수 있었다. 잘못된 신념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미개한 사회의 원주민들이 문명개화로 이끄는 선진先进의 노력을 억압으로 느끼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례들을 뮈텔은 세계의 후진 지역에 파송된 동료 성직자들의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p.176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토를 죽인 이유를 이야기했다. 동양 평화를 외쳤고 자신이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지만,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그 죄악을 제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리고자 했다.
달력을 보니까 3월 27일이 부활절이었다. 3월 26일은 부활 성야를 맞는 신성한 날이었으므로 죽기에 합당치 않았다. 부활절에 죽을 수는 없었고 부활절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죽어 있어야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그래서 3월 25일은 죽기에 합당한 날들 중에서 맨 마지막 날이었다. P253
김훈의 글은 그 내용뿐 아니라 사용하는 단어나 문체도 계속 곱씹게 된다. 우리말로 쓰인 글이 어째서 더 깊은 감동을 주는지 느낄 수 있다. 마음에 오래 남을 소설을 만났다.
안중근은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꼈다. 말들은 탄창 속으로 들어가서 발사되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가 총밖으로 나와서 긴 대열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말은 총을 끌고 가려했고, 총은 말을 뿌리치려 했는데, 안중근은 마음속에서 말과 총이 끌어안고 우는 환영을 보았다. 법정에서 사형장까지는 멀지 않았으나 말을 거느리고 거기까지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