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가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 이번 추석에 제주에 가?"
"네."
"그래? 나도 가보려고. 올레길이나 걷다 오려고."
출근길에 마주친 교장이 나를 보고 웬일로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시점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14년 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던 그때 당시에는 교직사회는 말 그대로 수직적인 조직 체계였으며, 교장의 말이 곧 법인 시절이었다. 산행을 즐기던 처녀 교장은 매 주말마다 교감과 부장들을 데리고 산을 탔다. 그녀의 여가 생활을 위해 가정이 있던 부장 교사들은 승진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의 산행에 늘 함께했다.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났던 타 학년 부장 교사는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도 없는 나를 보더니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승진하려 하지 마세요. 매 주말마다 산 타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어요. 그리고 저 곧 이혼할지도 몰라요."
처음 만난 그 남자 부장은 20대의 나에게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산행에 함께 하는지, 직장에서 부장으로서 일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하고 있는지, 그로 인해 아이들과 아내분과의 갈등까지. 숨기려 해도 터져버린 그의 입에서는 넘칠 만큼의 하소연과 고단함이 전달되었다.
그런 교장이 나에게 추석에 내 고향 제주에 갈 거라고 한다. 무슨 의미일까?
오랜만에 방문한 내 고향 제주는 여전히 뜨겁고 아름다웠다. 나지막한 건물들과 제주의 돌담, 바다. 그리고 푸른 하늘까지 나를 환영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있는 곳. 제주에 살 땐 몰랐던 제주만의 아름다움을 흠뻑 느끼며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몸이 안 좋아지신 할머니를 뵈러 병원에 갔다. 누구보다 예뻤던 나의 할머니는 세월을 온몸으로 맞은 듯하였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과 다리가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다고, 할머니 말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몌별아, 빨리 결혼 허라게. 할망은 우리 몌별이 결혼하는 거 봥 죽어사주. 잉?"
(몌별아, 빨리 결혼 하렴. 할머니는 우리 몌별이가 결혼하는 거 봐서 죽고 싶어. 응?)
만날 때마다 결혼과 죽음을 연관시키던 할머니의 타령. 이젠 그녀의 타령도 들을 수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 눈빛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따르르릉.
'누구지?'
"여보세요?"
"몌선생, 나야. 가족들 잘 만나고 쉬었어?"
교장이었다.
"네, 교장선생님. 올레길 잘 걷고 계시죠?"
"응, 근데 내가 몸이 좀 안 좋아. 여기 서귀포 쪽 리조트인데 이쪽으로 올래? 여기 넓고 좋아. 잠 잘 준비를 하고 와도 되고."
"교장선생님,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지금 병원이에요. 그리고 오늘 밤은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보내는 날이라서요."
"어머, 그래? 그럼 슬리퍼만 하나 사다 줄래? 나 다리에 뭐가 쏘였는데 다리가 아파서 걷지도 못하겠는데 트래킹화라서 불편하네. 어디서 사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안된다고 말을 하고, 할머니의 병문안을 하는 중이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것이다라는 나의 말이 그녀에겐 들리지 않았나 보다. 슬리퍼를 사서 오라니... 내가 수행비서도 아니고. 너무 당황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부모님께 여쭙고 다시 전화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부모님께서는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진짜 너에게 연락을 할 만큼 도움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니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녀가 요청한 슬리퍼를 사기 위해 나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일반 신발 가게들은 연휴라 문을 닫았고, 결국 문을 연 마트에서 삼색선의 슬리퍼를 겨우 찾아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제주사람들에게는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는 거리가 강남에서 파주까지 가는 정도의 느낌으로 부담을 느낀다.) 그녀가 머무르는 숙소를 찾아 슬리퍼를 사서 들고 가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웃기는지. 추석 명절에 혼자 놀러 온 처녀 교장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가족들과의 시간도 희생해야 하는 것인지. 버스에서 나에게 하소연하던 부장 교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그녀가 묵고 있는 호실로 찾아가니 한 할머니가 있었다. 늘 우아하고 당당함이 넘치던 대장부 교장의 모습이 아니라, 드라이를 하지 않은 채 젖은 뽀글 머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화장을 하지 않으니 그냥 할머니 한 분이 계신 것 같았다. 그녀의 발은 벌에 쏘였는지 퉁퉁 부어있었고, 할머니처럼 보이던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내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붕당거리던 나의 입술은 자기의 역할은 잊은 채 들어갔고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 올라왔다. 나에게 뭐라고 하소연을 하시는데 나는 그녀가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요를 두 개 겹쳐 깔아 드리며 적당한 추임새를 던졌다. 그러셨군요, 힘드셨겠어요, 잘하셨어요.라고 하며.
"슬리퍼는 사 왔어?"
"네, 가게 문이 대부분 닫혀 있어서 예쁘진 않지만 겨우 사 왔어요."
"그래. 고생했네. 아이고, 이거 신고 공항 가고 서울 가려면 좀 그렇긴 하겠다. "
"교장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안 했어."
"그럼 제가 사 드릴게요. 같이 나가세요."
택시를 잡고 그녀를 모시고 식당에 갔다. 갈치조림을 사드렸다. 제주 사람들도 비싸서 식당에서는 거의 먹어본 적이 없는 갈치조림을, 부모님께도 한 번도 사드려 본 적이 없는 갈치조림을 그녀에게 사드렸다. 밥을 다 먹을 즈음에 그녀가 옆 테이블에 옹알거리던 아기를 한참을 쳐다보더니 말을 했다.
"몌선생, 선생님은 그냥 결혼해. 남자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내가 혼자 살아보니 잘 모르겠어. 왜 혼자 살았는지. 사람들 어려움도 잘 모르겠고, 공감도 안되고."
그녀는 갑자기 결혼을 안 한 것을 후회한다며 결혼을 하라고 했다. 사실 그분과 함께 직장 생활을 하며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아이가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가서 회식 중에 먼저 가보겠다고 인사하며 나가는 부장 교사에게 "선생님만 애 있어?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라고 말하던 교장이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아이가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정도가 부모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명절에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가족과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의미가 무슨 의미인 지 그녀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머리로는 알고 있을 테지만, 그녀가 나에게 그날 요구한 행동들을 보면 그녀가 사회 공감력이 이토록 떨어졌던 것이 결혼을 안 해서가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식사를 마치고 교장을 다시 이 숙소로 모시고 잠자리까지 잘 살펴드렸다. 나의 할머니라 생각하면서.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교장이 나를 불렀다.
"여기서 나랑 자고 가. 나 혼자 쓸쓸해. 내일 조식도 먹고 가 2인 공짜야. 나 혼자 먹으면 아깝잖아. 여기 방도 넓고 나랑 자고 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아쉽다고 말을 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일 서울로 가는 날이니 부모님이 너무 아쉬워하시고 아프신 할머니 얼굴을 한번 더 뵙고 올라가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나왔다. 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 다짐했다.
'그래, 결혼해야겠다. 결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