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산다.
하지만 그 마음이 언제나 들지는 않는다.
오늘 필사한 문장처럼, 그런 자신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
먼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진실을 마주하는 일이 중요하다.
돌아보면 나는 오랫동안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시집살이로 지쳐 있던 엄마가 걱정될까 봐
계단에서 굴러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혼자 상처를 씻고 약을 발랐다.
‘괜찮다’는 말로 나를 숨기며, 그저 엄마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 버릇은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내 몫보다 남의 일을 더 챙겼고,
몸이 힘들어도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 애썼다.
동아리 사람들의 모임에 술을 못 마시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 했던 이유도,
결국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기 싫어서’였다.
그날도 그랬다.
몸이 몹시 아팠는데도, 당시의 구남친(현 남편)이
죽이라도 사주겠다고 하며 집앞에 찾아왔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고, 한 걸음 내딛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먼 거리에서 집까지 찾아온 구남친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에 나갔다.
따뜻한 죽 한 그릇 앞에서 나는
한 숟가락을 겨우 뜨고 바로 다 토해냈다.
숨이 막혀 눈앞이 하얘지고,
그는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나 아파요?”
구남친의 말에 의하면 아프다고 하는 기준이 그때 처음 달라졌다고 했다.
나처럼 아파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그리고 그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단다.
이 사람을 내가 지켜야겠다고.
결혼하고 같이 살아보니, 남편은 왜 이렇게 내가 아픈 지 알겠다고 한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쓰며 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늘 지쳐 있었고, 그 지침을 ‘성실함’으로 포장하며 버텼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
남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이
결국 나를 가장 아프게 만들었다.
이제는 안다.
내가 건강해야, 내 삶을 지켜야,
비로소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타인을 위한 마음은
내 안의 에너지가 넘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거였다.
남을 위해 쓰는 에너지는
내 안의 잉여 에너지가 넘칠 때 흘려보내도 늦지 않다.
지금은, 내 안의 에너지를 채우는 일이 먼저다.
그렇게 충만해진 나로부터
비로소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울 수 있으니까.
그게 이기적인 게 아니라
내가 계속 살아가고,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지혜롭게, 몌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