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등산갈까?"
"등산?"
"응, 튼튼이 너 어릴 때 청계산 근처까지만 가보고, 근처에서 삼계탕 먹은게 다잖아. 정상 꼭대기까지 가보는 거 어때?"
"음...응! 좋아!"
그리고 아들과 약속을 잡았는데 목이 조금 따끔거렸다.
이 상태로 가는 게 맞나 싶어 조심스레 말을 꺼내봤는데,
“치… 약속해놓고…”
아쉬워하는 아들의 모습에 예전에 먹다 남은 감기약을 찾아 챙겨 먹고 느즈막히 출발.
주말이면 늘 주차장이 꽉 찼던 기억이 나 공영주차장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다행히 평일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을 거라는 안내를 받았고, 차를 끌고 가보니 주차장엔 자리가 있었다.
시작은 아들에게 “운동”이 아니라 “등산”이라는 경험을 한 번쯤은 선물해주고 싶어서였는데,
마음은 소풍이었고 현실은 거의 수련에 가까웠다.
갈림길에서 400m 옥녀봉으로 가는 비교적 쉬운 길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0대의 나에게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는 오래되고 과장된 기억을 철석같이 믿고
매봉 1.8km을 선택한 것이 오늘 하루의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엄마, 우리 한라산도 가보자요. "
등산 초입에서는 분명 괜찮다면서, 아니 꽤 여유롭게 “이 정도면 한라산도 가자”던 아들이었다.
말할 때만 해도 눈이 반짝였고, 발걸음에는 힘이 넘쳤는데, 산이란 게 원래 그렇듯 조금씩,
아주 교묘하게 사람의 자신감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널부러져 있던 나무 막대기를 주워 자연산 등산 스틱이라 이름 붙여주자
그때까지만 해도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거 있으니까 훨씬 편해”라며 열심히 걷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 스틱을 짚는 각도가 점점 절박해지고, 표정도 함께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나오는 질문.
“얼마나 남은 거예요?”
아이의 그 한마디에는 남은 거리보다
남은 체력,
남은 인내심,
그리고 남은 희망이 전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도 잠깐 대답을 미뤘다. 왜냐하면 분명 내 기억 속의 매봉은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보다는 ‘아, 운동 좀 된다’ 정도의 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의 나는 그 기억 속의 내가 아니었고,
아이만큼이나 나 역시 다리가 묵직해지고 숨이 가빠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는 “조금만 더 가면 돼”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왜 이 길이 이렇게 길지’ 하고 중얼거리고,
예전의 나를 살짝 원망도 해보면서,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건 아마 오늘 이 시간이 힘든 만큼 오래 기억에 남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등산객들이 가장 자주, 가장 자연스럽게, 그리고 가장 태연하게 한다는 말,
“거의 다 왔어”를 오늘 나는 아들에게 수십 번쯤은 말한 것 같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 수십 번이다.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엄마, 더 이상 못 가”라는 말이 돌아왔고,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으로는 ‘나도 힘들어’라고 외치면서도 입으로는 “조금만, 진짜 조금만”을 반복했다.
아들을 꼬드기고, 달래고, 응원하고, 거의 협상에 가까운 대화를 이어가며
결국 정상에 섰을 때는 뿌듯함보다 먼저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진짜 해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하산길 역시 쉽지는 않았지만,
(아들 표현에 의하면 그냥 여기서 살테니 엄마 혼자 내려가라고 ㅋㅋㅋㅋ)
올라올 때보다 말수가 조금 줄어든 아들을 보며
오늘 이 산이 우리 둘에게 꽤 큰 기억으로 남겠구나 싶었다.
체력은 바닥이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꽉 찼다.
산을 오르며 나는 계속 말을 했다.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같이 가면 돼.”
그 말들은 아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는 걸 이제야 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단순한 동행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를 조용히 결정하는 일이라는 문장이,
아들과의 매봉 등산길에서 유난히 또렷해졌다.
아들은 오늘 ‘힘들다’는 말을 배웠고,
나는 ‘그래도 같이 가면 된다’는 말을 다시 배웠다.
아마도 언젠가 이 아이가 힘든 길 앞에 섰을 때,
오늘 내가 수십 번 건넸던 그 말들 중 하나가 아이 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남아주기를,
그래서 또 다른 오르막 앞에서도 한 걸음 내딛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날은 그렇게,
말로 약속을 만들고
말로 서로를 끌어주며
말로 기억을 남긴 하루였다.
@지혜롭게, 몌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