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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4가 끌리는 이유

미국 박사 도전기, 다섯 번째 이야기

by 마이 엘리뷰

(이 글은 각 평가요소에 따른 미국 대학의 전공별 공식 순위 통계자료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글에 등장하는 학교 지망 순위는 개인적인 전공 관심과 선호에 근거해 작성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자랑하려는 건 아니다. 난 매번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최상위권은 아니었으므로. 반에서는 1등을 해도 전교 10위권에 들어가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던 적당히 흔한 ‘모범생’의 위치. 고3 막바지 전교 1등을 ‘꿈처럼’ 딱 한 번 해본 적이 있었다. 너무 꿈같아서 도무지 믿기지 않던 순간. 하지만 난 전교 1등보다 ‘전교 4등’을 했던 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순위는 그보다 낮을지라도 희열과 뿌듯함, 편안함의 농도는 그보다 짙었다. 탑3는 아니지만 탑5에는 안착해있는 안정감. 금은동메달을 거머쥐진 못했도 5등 안에 들었으니 충분히 박수받을 수 있는 자리. 진선미로 주목받지는 못해도 그에 걸맞은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셈. 한 계단 아래 내려선 그 상태의 아슬아슬함이 좋았던 것 같다. 1,2,3위권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오히려 그 진선미와 금은동을 살금살금 엿볼 수 있는 여유를 탑재할 수 있는 4등의 위치.


난 언제부터인가 4등의 자리가 좋아졌다. 아주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1,2,3등의 후광에서 살짝 밀려나 그늘진 곳에서 내 만족을 적당히 누릴 수 있는 자리. 불안정한 듯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안정감과 균형을 찾기 좋은 모호함의 영역.



언제부터인가
4등의 자리가 좋아졌다


세상살이를 모두 ‘등수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도 안되지만), 박사 지원할 학교를 추리다 보니 자연히 나만의 지망 우선순위를 짜게 된다. 1지망, 2지망, 3지망... 을 쭉쭉 적어 보다 보면 아무래도 학교에 대한 명성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관심분야와 세부 전공, 그 속에 몸담고 계신 지도 교수님과의 궁합도 물론 중요하겠다. 하지만 어쨌든 경제적 육체적 심리적 노력을 엄청나게 투하해야 할 내 박사과정일진대, 입학 지원을 하면서 학교의 대외 인지도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니까. 개인차, 전공 차가 있겠으나 매스커뮤니케이션 속 ‘이머징 미디어 (Emerging Media)의 세계를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은 나의 현재 리스트는 이러하다. (하하, 보스턴은 하버드와 MIT로 유명한 도시지만,,, ‘아이비리그’ 학교는 초반부터 쿨하게 제외하고)


1) 도시의 이름이 그대로 담긴 B 대학, (2) 주의 이름이 담긴 M 대학의 A 캠퍼스, (3) M 대학의 B 캠퍼스, 그리고 도시 안에 (4) 또 다른 사립대학교 한 곳 N 대학까지... 사정상 매사추세츠 주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지원할 수 있는 대학교의 모수가 많지 않은 게 다소 아쉽다. 허나, 육아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입시지원 판을 한없이 키우는 것도 부담. 딱 네 곳만 지원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입시라는 게 늘 그렇듯 추후 입시전략이나 내 마음 변동 가능성은 무궁무진)



어디에서 어떤 열매를 맺게될지, 차근차근 계획해보는 날들




고심 끝에 골라둔 네 곳의 학교와 세부 전공. 네 곳 중 어느 곳에서 박사과정을 이어가든 ‘후회 없이 좋다’는 마음이 이미 철저히 반영된 결과다. 당연히 1지망에 적어둔 학교와 전공에 덜컥 합격하면 좋겠으나 그게 아니면 2, 3지망이 받아들여져도 충분히 좋다. 감사하다. 단순히 공식화된 어떤 시험의 점수순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게 아니므로 ‘운’의 요소도 꽤나 작용할 것 같다. 전공에 대한 내 세부 관심분야과 마침 그 대학, 그 전공 교수들의 최근 관심분야와 필요에 촘촘히 맞아떨어진다면 나는 매력적인 지원자 중 한 사람으로 간택될 테고, 모든 점 수치가 높다고 할지 언정 내가 생각해두고 있는 미래 연구계획과 교수진들의 연구 방향성이 미세하게나마 균열을 낸다면 난 어쩌면 모든 곳에서 ‘똑’ 떨어질지도 모를 일. 박사 지원에 대한 경험치가 없고 이 모든 절차 또한 처음이니 짐작할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방향과 계획이 섰다면 어쨌든 내 지망 계획에 맞춰 노력을 해야 한다. 다만 요즘 조금 이상한 일이 생겼다. 상식적으로는 최대한 높은 지망에 적어둔 학교에 가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데 가장 마지막에 적어둔 학교에 애착이 가는 거다. 이게 1지망인 건가,,, 스스로도 마음에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왜일까. 우선 1지망 B 대학, 뽑는 인원이 대단히 적고 다른 곳에 비해 내야 할 서류가 많아서 마음이 초반부터 쫄깃하다. T.O. 가 적으니 자연히 기대치가 낮아져 버렸다. “여긴 가고 싶은데 사실 기대는 안 해”라는 오묘하게 모순된 말을 반복하는 내가 스스로도 웃긴다. (그럴 거면 왜 지원하니?).


2지망 M 대학 A 캠퍼스, 사실 마음속 워너비인 데다 커리큘럼, 내 연구 방향성 모든 게 착착 맞을 것만 같은데 사실 ‘거리’가 상당히 멀다. 미국에서 주와 주를 넘나들며 지원하고 거처를 이동하는 건 흔히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지만 난 ‘육아와 학업’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일명 ‘스터딩 맘’. 입학 시기 기준 두 살 아기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내게 왕복 3시간가량을 등하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다. 합격한다 해도 사실 마음이 걸리는 요소가 꽤나 많아서 찜찜하다. (그래도 붙여주시면 너무너무 감사하지요.)


3지망 M 대학 B 캠퍼스, 2지망과 같은 학교지만 캠퍼스는 완전히 다르다. 자연히 집과의 동선도 전반적인 학교 인지도 명성도 다 좋은데 나머지 세 곳에 비해 내가 연구하려는 분야에 꼭 맞는 세부 전공이 부재한다. 전공을 살짝 틀어 지원은 해볼 계획이지만 운 좋게 입학 승인이 난다 하더라도 내 현재 꿈꾸는 연구 방향성에 ‘딱 맞는 옷’은 아닐 테니 아무래도 뒤틀림이 잦을 것 같다. (물론 합격하면 이 또한 행복하게 고민해볼 문제겠지만).


조금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가장 마지막에 적어둔 학교에
눈이 가는 요즘


분명히 난 네 번째에 적어두었는데 그 4지망에 대해 마음은 자꾸 1순위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왠지 1,2,3지망에 적어둔 학교들보다는 아주 살짝 경쟁이 덜하지 않을까 근거 없는 기대감도 솟는다. ‘주립대’가 아니고 누구나 알 만한 도시 이름이 콕 박힌 ‘그’ 학교가 아니니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 미국 살이 초보자의 환상. (분야가 독특하고 희소성 있어서 되려 경쟁이 셀 수도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학과 간 협동과정 방식으로 개설된 과정이라서 ‘이머징 미디어’를 공부하고 싶은 내게 좀 더 잘 맞는 옷일 것만 같다. 코스웍이 전통적인 과정에 비해 살짝 특수해서 차후 나만의 분야를 특화해 나가기도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설레발 더해서 내 지도교수님이 되어주셨으면 하는 분의 리서치 논문도 차근차근 살펴보는 중.


와! 이거야. Ephiphany! 마음이 꽂히니 자꾸만 장점만 보이는 걸 어떡하나. 박사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1,2,3지망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니 나도 모르는 틈에 나 스스로를 자꾸 4지망에 맞춰나가며 합리화 작업을 해나가게 된 걸까. 어떤 이유에서든 내 마음은 자꾸만 ‘4’라고 적어둔 숫자 옆을 기웃거린다. 이쯤 하면 4지망이 4지망이 아니다.



난 어느 캠퍼스에서 공부하게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쫄깃.



어렴풋이 전교 4등이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들이 말하는 탑쓰리 (Top3)의 영역엔 서지 못했으나 한 걸음 빗겨난 영역이 싫지 않았던 시절. 탑 파이브 (Top5)로 따지자면 나도 낙오되지 않은 셈인데다 탑쓰리의 아우라를 살금살금 엿보며 적절히 모델삼아 자극받기 좋았던 위치. 내가 탑쓰리의 영역 안에 들어가면 1등이고 2등이고 3등이고 다 ‘경쟁자’로만 보여서 마음이 팍팍하고 까칠할 것 같은데 그 영역 밖인 덕분에 마음이 좀 더 말랑한 감촉을 쥐고 있을 수 있는 ‘느슨한’ 자리. 난 그래서 4라는 숫자가 좋고 네 번째에 해당하는 ‘적절한 우수함’이 좋았다. 1st, 2nd, 3rd,,, 까지만 해도 각각에 해당하는 특별한 서수가 붙지 않던가. 네 번째부터는 4th, 5th, 6th,,, 평범한 서수 패턴의 시작이 되는 첫 번째 위치. 일반적인 흐름의 시작을 주도하는 그 네 번째짜리쯤이 편하고 좋더라. 최상위권은 왠지 내 자리 같지 않은데 조금만 계단을 내려오면 되려 균형을 잡는 느낌이었다. (물론 4 지망에 살포시 적어둔 학교가 실제 공정한 평가기준에 의거한 대학순위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님 주의.)



말랑한 감촉을 쥐고 있을 수 있는
느슨한 자리
일반적인 흐름을 주도하는
그 네 번째 자리쯤


1지망 2지망 3지망에 적어 둔 곳이 아니라고 해도 좋아. 맨 마지막에 네 번째 자리 옆칸 적어둔 곳에서도 내 리듬과 균형을 찾아갈테니



나는 어떤 학교에서 공부하게 될까. 이번 텀에는 지망 순위를 불문하고 다 나와 인연이 아니게 될 수도 있고, 혹은 마음이 자꾸 향하는 4지망보다 기대적은 1지망의 대학만 떡하니 내 연구의지를 받아 들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간직해두고 싶어서 쓴다. “꼭 탑쓰리 안에 들어서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히려 1, 2, 3위, 금은동 메달, 진선미 영역에 서지 않아도 아쉬움 하나 없이 인생 더 괜찮아 질지 모른다고.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그 4의 영역을 좇고 좇으면서 균형 잡고 편안해 해 왔던 리듬감이 내 안에 깃들어 있다. 나도 사람니까 1등, 2등, 3등 다 좋은데, “4등도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라고 생각해왔던 마음. 전국권 시청률 1등의 최고의 방송사 (이젠 그런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1등 인지도를 자랑할 탑 아나운서는 아니었으나 가만가만 적당히 그늘진 듯한 자리가 늘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하여 난 내가 적어둔 지망 리스트가 네 번째 영역을 다시금 슬쩍 쓰다듬어 본다. 4지망이라 적어두었지만 어쩌면 이미 내 마음에선 그 4지망을 최우선으로 보살피고 있는지도 모른다. 4가 지닌 묘한 마력이 좋아서. 그 특유의 빗겨난 정서, 잠재력, 모호함의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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