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박사 도전기, 여섯 번째 이야기
늘 경력란을 채워 적는 과정만큼엔 자신이 있었다. 사실상 ‘공백’이라 표현할 기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4학년 2학기를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한 보도 채널 (현 종편 채널)에 보란 듯이 합격해버렸고, 그 이후 두 번의 이직이 있었으나 한 직장에서 한 직장을 옮기는 데 필요한 여백은 비교적 짧았다. 모두 간절히 원했던 직장이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내 공간이 됐다. 2008년 10월에 첫 직장에 합격했고 2019년 2월까지 일했으니 총 11여 년의 시간 동안 빼곡하게 일해온 셈이다. 20대 초반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보사 기자로 치열하게 뛰어다니고, 일간지 대학생 인턴기자 생활을 ‘빡세게’ 이어왔던 것까지 따져본다면 내 삶은 참 빈틈이 없었다. 늘 바빴고 꽉 차 있었다.
아나운서 정규직을 사뿐히 내려두고 ‘미국 유학 행’을 택했을 때 역시, 난 ‘느슨해지기’가 사뭇 두려웠던 것 같다. 한 개인의 성향이 살아갈 나라가 바뀌고 직업을 내려뒀다고 해서 어디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엘리야 너는 잠을 안 자고 과제하니?”, “너 설마 24시간 그냥 깨어있니?” 같은 석사과정을 밟던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허다하게 들었다. 남편도 다소 황당했을 것이다. 새벽 5시부터 집을 나서서 보스턴 도심 지하철을 타고 학교 근처 카페로 공부하러 나가는 신혼 초기의 아내라니… 게다가 석사 본 과정에 진입한 이후, 난 극강의 입덧을 경험하던 임산부였음을 고백한다. 적당히 뒹굴거리며 미국 햇살 아래 늦잠도 자보고 입덧을 핑계로 하루쯤은 학교도 땡땡이 쳐보고 남편에게 안 가본 도시로 즉흥여행을 떠나자고 졸라볼 만도 한데 난 늘 치열했다. 모든 직업을 내려두고 ‘학생’으로의 회귀를 택했지만 ‘경력’에 뻥 뚫린 자국이 생기는 게 내심 싫었던 거겠지. 열혈 공부로, 불타는 유학생 모드로 그 빈틈의 느낌을 메우려고 했던 게 분명하다.
그랬던 내가 요즘 다소 ‘빈틈’이 생긴 일상을 살고 있다. 이른바 ‘경력 공백기’. ‘경단녀’라는 표현 속 ‘단절’의 의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공백’과 ‘빈틈’이라는 단어를 대체제로 꾸역꾸역 밀어 넣어본다. 올해 초 석사학위를 거머쥐었고, 내년 박사과정을 시작하고자 준비 중... 허나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원하는 과정에 진입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 학업계획서를 쓰고 접수하고 몇차례의 합격불합격 통보를 받아야하겠지.
육아휴직을 내고 직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육아맘,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지 않고 본인의 탄탄대로를 갖춰온 또래 커리어우먼에 비한다면 난 확실히 여유로운(?) 1인이다. 빈틈에 불확실함이 더해지면 종종 평정심을 유지하기에 위태로운 시점이 찾아들고야 만다. 팬데믹 속에서 타국에서의 임신 출산 육아를 전쟁 치르듯 이어왔다면 1년쯤은 슬렁슬렁 살아낼 만도 하겠으나 20대 초반부터 ‘빈틈’과 ‘공백’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나는 선물처럼 주어진 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기(?)’가 다소 어색하고 머쓱하다. 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들은 버럭 화를 낼 만도 하겠다.
“아니 너는 육아를 하고 있잖아.”
“그 어렵다는 GRE 시험도 봤잖아.”
“현지 교수님과 리서치도 했잖아.”
아, 그렇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시기라고 표현했으나, 그 속에서도 난 꽤나 애쓰고 있었구나.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말, 육아에 드는 정성과 귀한 마음을 가벼이 여기려는 것은 아니다. 미국대학원 입학시험에 꽤나 천천히 공을 들여온 매 순간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예전의 내가 ‘외부에서’ 쌓아온 경력과 그에 응당한 월급 이력에 여백이 생긴 것은 어찌 부인하리오. 누군가는 내가 일했던 분야에서 똑같이 경력을 이어가고 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개인 사업체를 탄탄히 쌓아 올려 새 도전을 이어가고 이력 빌딩을 쌓아 올리고 있지 않은가. 남과의 비교는 불행의 씨앗임을 진즉에 잘 알고 있으나 “나도 사람인지라” 때때로 멈춰서 있는 것 같은 내가 진짜 “괜찮은 것인지” 물음표를 품게 될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거기에 육아는 힘들고 내 리서치에 ‘빛’이 찾아드는 것 같지 않으면 한없이 지오디의 ‘길’ 노래를 읊조리는 수밖에.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나 내년에 거기 합격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내가 보기엔 다 붙을 수 있어.”
괜히 불안한 마음이 떠올라 마음이 들썽거릴 땐 남편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입학사정관도 아니고 나와 같은 분야 교수진이 아님에도 ‘남편’이라는 기둥에 기대 은근슬쩍 마음 내려놓기 대작전. 타당성 99%의 근거를 갖춘 응원이 아닐지라도 조건 없이 믿어주는 마음은 늘 힘이 되기 마련인 걸. ‘나의 경력 공백기’에 대한 불안감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남편의 담백한 신뢰로 흩어져버린다.
박사 학위라는 더 큰 도약을 위해 그 준비를 차곡차곡해나가려 잠시 ‘움츠린’ 기간일 뿐, 나의 경력은 단절된 것도 아니요, 이때까지의 경력이 무의미하게 바래버린 게 아닌 거라고 다시금 꾹꾹 눌러 되새긴다. 몸을 한껏 꼬깃꼬깃 눌러 도움닫기를 하는 시간까지 불안해한다면 그 어떤 ‘폴짝’ 점프를 경험할 수 있을까. 경력공백은 그런 의미에서 곧 귀한 도움닫기의 기회다.
박사과정에 지원하고 접수를 마무리 짓기까지 여전히 수개월이 남았지만 잠시 나 혼자 멈춰 선 듯한 느낌에 지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나의 경력 공백기, 5년 뒤 더 멋져지기 위해, 10년 뒤 더 웅장한 스토리를 만들어가기 위해 숨 고르며 정돈하는 약 15개월 정도의 시간일 뿐이다. 나는 다시 힘껏 뛰어오를 것이다. 그곳이 티브이 속 화면은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