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 외워보셨나요?

[아나운서 그만두고 34가지 일상기록-18] 미국 새 번호가 생겨버려서요

by 마이 엘리뷰

처음 핸드폰을 산 게 바로 중 3때였다. 중학교 2학년 때쯤 한창 걸리0폰을 필두로 폴더형 폰이 본격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기.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일이다. 중간고사였는지 기말고사였는지 정기고사가 끝난 뒤 다른아이들보다는 다소 늦게 내 핸드폰이라는 것을 거머쥐게 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하늘'폰. 당시에는 최초로 핸드폰 카메라를 탈부착할 수 있었던 그 폰. (내장형 카메라가 아니라 끼워쓰는 카메라라니 정말이지 생경하다) 새 핸드폰 모델을 득템한 게 기분좋으면서도 덩달아 나만의 '전화번호'가 생겼다는 사실에도 흥분하기 충분했다. 당시에는 전화사서함이나 나우00, 유니0 같은 통신으로 새 문명을 서서히 체감해나갈 때였으므로 걸어다니는 전화기 역시 가히 혁신적이었다. 게다가 내 이름 아래 내 '번호'가 딱 하나 생긴 거잖아! 조금 과장하자면 내 아파트나 내 오피스텔을 가지게 된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소유하게 된 나만의 핸드폰 번호, 당시에는 011로 시작했었더랬지. 그렇게 18년 동안 같은 번호를 써왔다. 그리고 정확히 2019년 2월 28일 미국행 하기 전, 한국의 핸드폰 번호를 해지했다.

한 나라를 떠나오면서 꼭 해야할 미션 중 하나. 전화번호를 바꿔야지.


내 번호인데도 불구하고
꽤나 여러 번
천천히 버벅거려야만 했다


미국에 온 첫째주, 그 주 T.G.I.F 불금날 미국 통신사에 가입을 했다. 남편이 가입해있는 통신사에 나란히 회선을 신청하면 돼서 절차는 어렵지 않았다. 혼자 유학을 와 지내면서 새폰을 개통하려 했다면 다소 버벅거렸을 일들이 단숨에 처리되고 나서 받아는 나의 새 번호. 인생 두 번째 전화번호. 앞 세자리부터가 한국과 판이하게 다르니, 이를테면 흔하디 흔한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아니다보니 외우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네 싶었다. 게다가 누군가 내 번호를 물어왔을 때 영어숫자를 이야기해야하는 건데, 그 어떤 말을 할 때보다 난 숫자를 영어로 이야기할 때가 너무도 헷갈렸다. 달러 단위로 다소 큰 액수를 이야기할 때가 특히 그러하고 밀리언 빌리언 다 머리로는 알아도 피부로는 안와닿는 거니까. 여전히 누군가가 시간을 툭 던져 이야기하면 dazely 한 5초정도 눈알을 굴리며 아..아. 하고서야 깨닫는 것 같다. 하물며 내번호인데도 불구하고 열한 자리의 숫자를 발음해서 전달하는 데 꽤나 여러 번 천천히 버벅거려야만 했다. 그 단순한 숫자나열뿐인데도.


애플워치를 연동해놓고도 정작 전화번호는 가물가물했던 정착 초기


난관은 멤버십을 조회할 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네 전화번호가 뭐냐. 우리가 조회해줄게. 자동으로 포인트 쌓아줄게"하는 경우가 잦은데, 그럴 때마다 새 전화번호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가만있어보자. 내 번호가 말이지..." 하며 멈칫해야만 했다. 워낙 관광객도, 이민자도 많은 나라이니 잠깐 어리바리하는 모습을 보이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싫은 기색 보일 리 만무한 미국이지만, 그럼에도 "아니, 내 번호조차 왜이렇게 못말하는 거니' 내 신상조차 버벅거려야 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종종 싫어서 마음잡고 제대로 내 번호를 외우겠다고 결심에 또 결심한 적도 있었더랬다. 구구단 외우듯이, 초집중해서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나 암기력 괜찮은 편인데 그다음날이면 또 내 11자리 전화번호를 기어이 가물가물 잊고 말았다. 썸남의 번호도 아니고 직장상사의 번호도 아닌, 내.전.화.번.호.인 거잖아! 이도저도 안되겠다 싶어서 숫자 하나하나를 쪼개 의미를 부여했다. 978로 시작하니까 1997년 8월에 내가 무슨일이있었냐면 말이야...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있다면 쉽게 잊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문제는 단 하나. 스토리가 있으니 번호를 결코 잊지는 않는데 누군가가 "네 번호뭐야"하고 내 코앞에 바로서서 툭 던져 질문했을 때 "응, 내 번호는 말야" 하고 바로 답이 쏜살같이 나가주진 않는다는 거였다. 미국 번호를 받아들고 약 한 달간은 적잖이 헤맸던 것 같다. 슬쩍슬쩍 참고를 해야할 땐 스스로 민망함에 핑계를 중얼거리곤 했더랬다. "내가 몇 주전에 와서 핸드폰을 샀거든요. 새번호가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hesitation의 이유가...그런 거고요...그러니까 내 번호는 말이지요."


하루하루 걷는.속도에.맞춰 새로운 것도 자연히 내게 흡수될 거라고
꿀떡같이 이야기해도
송편처럼 알아듣고 움직여주는 사람들
허나 숫자는 정확해야 한다


"내가 내 나라에서는 발음도 정확하고 오독도 없어야 하는 broadcaster였단 말이지요"


알긴 아는데 입으로 정확하고 빠르게 답하지 못하는 건 정착 초기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속보가 주어지면 망설임없이 오독없이 정확하게 당황하지 않고 on-air 중에 평탄히 말할 줄 아는 '아나운서' 역할만 10년을 해 온 내가 아니었던가. 정말이지, 늘 흔들려야 했고 늘 단숨에 휙 말할 수 없었으니 아무리 언어가 다른 걸 가정해도 자괴감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한국어로 방송을 할 때는 (당연히 그리하면 안 되겠으나) 종종 딴 생각을 하며 방송 그 자체에 잘 집중하지 못하더라도 빠르고 담담하게 '리액션'을 정확한 발음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만, 정반대의 상황을 늘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영어가 제법 익숙해져도 발음과 억양의 한계는 여전하고 조금이라도 정신을 팔거나 심신이 지치면 표현이 뭉개져서 나 스스로도 '나 뭐래니' 하는 순간들이 어김없이 찾아오기마련. 꿀떡같이 이야기해도 송편처럼 알아듣고 움직여주는 상대방 외국인이 종종 얄밉기도 하다. 못알아들어줘야 내가 더 정교하게 실력을 가다듬을 거 아냐! 허나 숫자는 정확해야 한다. 대충말하면 내 멤버십 조회가 안된다. 액수나 시간을 잘못 이야기하면 굉장한 오해를 살 수 있다. 이런 와중, 단순한 열 한 자리의 숫자 나열 전화번호 암기는 생각보다 몸과 마음이 온전히 작동해 받아들이기까지 꽤나 오랜시간이 걸렸다.


"나처럼 전화번호 없이 살아보는 삶은 어떠한가"


기존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것을 흐릿하게 지워서 새것으로 물들이기. 한국번호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미국번호 새겨넣기. 적고보니 여러가지 닮은 활동들이 떠오른다. 짙은 검은색 머리를 탈색해서 핑크톤, 골드톤으로 물들인다든지 (그러고보니 한동안 하지 못하고 방치한 긴 머리를 깔끔하게 염색하고 싶다), 텀블러에 담겨있던 커피찌꺼기를 깔끔하게 닦아내고 새 음료를 테이크아웃한다든지, 시들어가는 꽃만 가득 꽃혀있던 꽃병에서 말라가는 흔적을 미련없이 버리고 새 장미꽃을 채워놓는다든지 하는 것들. 18년 동안 몸과 마음에 새겨뒀던 열한 자리 번호가 서서히 흐릿해가려고 할 때쯤이었을까. 미국에서의 새 전호번호를 자연스레 입으로 조물거리게 된 순간이 찾아왔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입이 먼저 반응하는 것. 이것 참 생각할수록 기묘한 경험이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입을 뗀다는 건, 그만큼 나도 모르게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 그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영어숫자와 관련된 표현들, 화폐와 돈액수와 시간에 대한 감이 조금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던 건. 그냥 말보다 더 어렵고 불편한 영어 숫자의 세계란!

숫자에 익숙해지기. 번호에 익숙해지기. 진짜 내꺼가 되기까지는 기존에 외고있던 숫자가 묻힐 수 있는 시간이란 게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그렇게 분초가 흘러서
몸과 마음이 동시작동해
몸 속 가득 자리잡는 것들이 생겼다


"나인 세븐 에잇..."

영어 전화번호를 본능적으로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진 요즘, 그렇다고 한국 번호를 쉽게 잊을리야 없겠으나 잠시 3초 정도 멈칫거리는 나를 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역시 세상에는 '시간이 필요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레 한국 번호는 '생각해 내야하는' 대상이 되었고 반대로 미국 번호는 생각하지 않아도 '입이 먼저 기억하는'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정확히 반대가 된 거다. 물론 1차적으로 외우려 하는 노력이 필요하기야 하겠으나 외워서 생각해 말할 수는 있었어도 '내꺼'가 되진 않았었다. 내 새 전화번호를 외웠으니, 외운 걸 머리로 꺼내보는 수준에 그쳤을 뿐.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한국 전화번호보다 미국 전화번호가 더 먼저 기억나는 불가사의한 신비력은 찾아오지 않더라. 시간이 지나니 잊혀지는 영역이 생겼고 그렇게 분초가 흘러서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동시작동해 몸 속 가득 자리잡는 것들이 생겼다.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암기능력, 반복습관, 재현의지와 상관없이 필수였다. 아나운서 최종면접에 갈 때마다 받았던 단골 질문이 "박수현 씨는 너...무 모범생으로만 살아온 게 아닌가요?" 였을 정도 착실히 암기도 잘하고 몰두도 잘하는 나. 즉 답답할 정도로 책상머리에서만 지극히 재미없고 담담하게 살아온 것 같다는 지적을 늘 받곤하는 백면서생 노력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혈 착실모드로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서 비워내고 채워가는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는 없는 거였다. 새 전화번호에 몸과 마음이 완벽 적응하기 위해서는 '열심히'사는 것보다 시간을 '흘려보낼 줄 알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작업이었음에 무릎을 탁 치고야 말았다. 아무리 외워도 첫주에는 자꾸만 잊어버리고 잊어버렸던 새 전화번호. 내꺼하기 참 힘들었던 녀석.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암기능력, 반복습관, 재현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부리지 않아도 내안에 들어올 열 한 자리의 숫자 뭉치들


새 전화번호와 친해지듯이 새 세상을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용을 써서 새 번호를 내꺼로 완벽하게 숙달하려고 해도 헌 번호가 이미 20년 가까이 나를 장악해온 이상 온몸으로 '내꺼'하는 데는 내가 저항할 수 없는 시간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듯이. 친구가 진짜 죽마고우 '베프'가 되려면 20여 년의 세월이 훌쩍지나가있기마련이고, 그럴 땐 "우리가 진짜 얼마나 끈끈한지"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베프는 베프이지 않던가. 부부도 마찬가지. 두 사람이 얼마나 화목하고 다정한지를 구태여 단기간에 sns 몇 장의 사진과 선물로 자랑하려 힘주지 않아도 그냥 은은하게 묻어나는 법. 그건 서로를 알아온 시간의 힘이 자연히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인 것. 애쓰고 애쓸 땐 그렇게 '내꺼'가 되지 않던 전화번호가 넉달이 지나고 다섯달이 지나가고나니 자연히 입술근육 미미한 근육따위가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게 된 '내 번호'로 외워지게 되었듯이. 잊어보려고 외면하려 애썼던 옛 한국 번호가 내내 선명할 때는 언제고 결국엔 점점 희미해지면서 내 중심영역에서 밀려나가주게 되었듯이.


자연스레 흘러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쓰다보니 한 가지 슬쩍 미안하고 민망한 일이 있다. 아직 남편의 미국 전화번호를 완벽히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몇 번을 외우려 애쓰고 머리로 노력했는데 결국엔 '툭'치면 '탁' 중얼거리는 경지까진 이르지 못한 거다. 연애를 2016년부터 했는데 이게 뭔 일이람. 굳이 전화걸 일이 없고 늘 모바일 메신저를 쓰다보니 이렇게 된 탓이라고 우겨보고싶으나 가끔 마트에 가서 남편 적립카드에 적립을 요청하려고 할 때마다 핸드폰을 꺼내서 남편 전화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다 보니 좀 머쓱하다. 이 또한 자연스레 흘러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딴 건 몰라도 위급상황 때 남편번호 정도 하나쯤은 외워줘야 하는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1년쯤은 같이 살아야 자동반사적으로 암송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거려나. 이 또한 시간의 힘이 날 이끌어주리라 믿어보며.


새 전화번호와 익숙해지듯이, 서서히 시간들여 익숙해지기


덧)


갑자기 불현듯 떠오른 생각들 여러 개. 미래에도 전화번호라는 것은 남아있을까. 전화번호부가 찾아볼 수 없는 구물이 되었듯이, 어머 엄마 어릴 때는 전화번호가 있었다고? 그게 뭔데? 하는 세상에 살게 되진 않을까. 지금 이 번호는 과연 언제까지 내 곁에서 머물게 될까. 이 번호를 대체할 무언가를 다시 외워야 하는 날이 다가올까. 첫 번째, 두 번째 전화번호가 내게서 지나간 뒤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암기하게 될 그 무언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