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이 지극히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본격 결혼 이야기!
결혼을 해야겠다 결심한 계기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ㅣ지금 내가 원하는 건
몇 년 전부터 물고 늘어진 화두는 ‘나의 고유한 욕망’이었다. 인문학 학교 건명원에 다니던 2019년에 나는 덜컥 인생 프로젝트란 과제를 받는다.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따라 인생에서 이루고픈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 질문에 심하게 몰두해버린다. 글쎄, 내 안에서 오롯이 피어난 욕망이 뭘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쩐지 그동안 내가 한 일들은 모두 내가 온전히 원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해야 할 일들을 관성처럼 해치우며 살아온 터라 대부분의 일에는 조금씩 남의 때가 묻어있었다. 어쩌면 나의 고유한 욕망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그저 모르겠거나.
그래도 힌트가 하나 있다면 나는 대학 때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쪽으로 쭉 공부를 하고 비영리 재단에서 풀뿌리 환경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자연보호나 기후변화에 대한 내 관심마저 회의감이 들었다. 괜한 도덕심과 책임감, 영웅심리는 아닐까? 내가 하는 일에 도무지 100% 확신과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주변을 이토록 오래 서성인 걸 보면 분명 이쯤 어딘가에 내 마음을 반짝반짝 빛내는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말이야. 거의 다 찾은 보물을 거머쥘 듯 말 듯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하루는 극단적으로 자문해보았다.
“1년 후에 죽는다면(진지) 뭘 하고 싶지?(심각)”
사뭇 진지하게 내가 진짜, 진짜 죽는다 상상해봤다.
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멀리멀리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싶어”
아직도 왜 꼭 멀리여야 하는지 이곳저곳이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다 내려두고 그냥 훌훌 떠나고 싶었다. 직업 여행가가 되겠다거나 명확한 목적이 있는 여행도 아니었다. 대체 어떤 맥락에서 품은 꿈인지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그냥 그게 지금의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이었다.
잡스 아저씨는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것들이 점점이 연결되어 어떤 인생이 돼 있을 거라고. 다녀오면 어쩐지 이젠 잘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잡스 아저씨 말에 속는 셈 치고 떠나야겠다.
ㅣ 근데 갑자기 결혼을..?
결혼은 내가 원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는 대체 언제 어른이 되어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하는 걸까? 모범생으로서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로 사는 게 익숙했던, K-파파걸의 성향이 있는 나는 결혼이 원가족으로부터 정신적, 물리적,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했다. 삶터를 구분하고 재정을 따로 관리하고 무엇보다 삶의 큰 결정에 있어 무게추를 내 쪽으로 옮겨오는 일. 세계여행을 위해 나는 결혼이 필요했다.
여기엔 지독한 맹점이 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원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건가? 내가 원하는 게 여행이면 결혼 말고 여행하면 되잖아..?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는 떠날 용기가 없었고 그런 마음으로 이제 내 맘대로 살아보겠노라 가족들에게 선언할 자신도 없었다. 1년 동안 세상을 떠돌다니. 착실히 커리어를 쌓고 연봉을 높이고 관계를 늘리고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에 다 내려놓고 싶다니. 예측 가능한 삶의 궤적에서 잠시간 아주 멀리 벗어나는 셈이었고, 어쩌면 그 후로도 다시 '정상성'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돌아올 의지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조차도 불확실한 나의 여행에 대해 부모님을 설득하고 결정을 고수하고자 고안해낸 게 그나마 결혼이었다. 스스로도 불안했던 내겐 모험을 함께 할 동료가 필요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눈 꼭 감고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내 꿈을 위해 굳이 결혼이라는 우회로를 택하다니. 결혼의 이유치고는 솔직히 부끄럽고 아쉽다. 성인이 되고 적당한 시기에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하지 못한 것에 더해 그 독립마저 결혼을 통해 새로운 타인에게 종속되어 이루려 한 게 아니었을까? 마치 결혼식장에서 아빠가 사위에게 딸의 손을 건네주듯 말이다. 원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이 이유라면 나는 결혼하지 않고도 그냥 나로 살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당시 내게는 그나마 결혼이 내 삶으로 한 발짝 다가간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여전히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결정일지라도.
ㅣ소름 돋는 사실은
이 글엔 J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WoW) 어남택과 어남류처럼 나의 결혼 상대도 ABCDE 그 누가 되든 무색할 지경이군 그래.
꼭 J와의 결혼을 결단한 계기나 시점이 명확하진 않다. 20대 중반부터 나는 슬슬 진지하게 결혼을 하고 싶은지 안 하고 싶은지 고민했고, 연애를 하면서는 이 사람과 결혼하면 대충 이렇겠구나 상상했고, 세계여행을 떠나야겠다 마음먹고는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결혼을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결혼을 결심한 데에는 J라서의 이유보단 나로부터의 이유가 월등히 컸던 것이다. 나는 결혼이 지극히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연인들을 떠올렸을 때 그 당시의 나 혹은 상대가 결혼을 진지하게 결심하고 밀어붙였다면 어쩌면 그와 결혼하지도 않았을까? 정말이지 상대가 택이든 류든 그 누구든 상관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같이 살아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맘에 드는 사람과 굳이 연애를 지속하는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관계 변화를 도모하는 건 결국 구체적인 어떤 필요에 의해서다. 나에게는 그게 세계여행과 여행을 함께할 동료와 아빠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이었을 뿐.
그나저나 결혼의 조건으로 함께 세계여행을 떠난다는 전제에 흔쾌히 동의했던 J는 어디 가고 나는 지금 혼자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사실 결혼의 계기니 이유니 이런 것들 다 부질없다. (아이고오 부질없다) 온갖 이성적인 판단으로 주체적인 결정을 내린 듯 말했지만 지나고 보면 ‘어쩌다 보니’ 그게 딱인 것 같기도. 어쩌다 보니 결혼 얘기가 나왔고 어쩌다 보니 가족들을 만났고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래서 어쩌다 보니 결국 여행도 혼자 하고 있다. 무튼 이렇게 스리슬쩍 시작된 나의 결혼은 불현듯 큰 눈덩이로 불어났는데 그 시작은 상견례였다. 내가 이다음 글들을 쓰려고 결혼 이야기를 연재했다. 지옥의 결혼 준비, 기대하시라! 뚜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