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17

제1부 인지혁명/ 4. 대홍수(118쪽~122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꼭! 2025.01.10.




제1부 인지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2. 지식의 나무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4. 대홍수


[필사와 단상]

4. 대홍수


기소 내용대로 유죄

일부 학자들은 우리 종에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한다. 이런 경우 전형적인 희생양인 기후변화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결백하다고 믿기는 어렵다. 기후변화의 누명을 약화시키고 우리 조상들을 호주의 대형동물 멸종과 연루시키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45,000년 전쯤 호주의 기후가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눈에 띌 만큼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다 새로운 기후 패턴이라는 단독 요인이 어떻게 그런 대량 멸종을 유발했는지를 알기도 쉽지 않다. 오늘날 무슨 일이든 기후변화 탓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화되기는 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지구의 기후는 결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기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역사상 모든 사건은 모종의 기후변변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특히 우리 행성은 수많은 온난화와 한랭화의 주기를 겪었다. 지난 1백만 년 동안 10만 년마다 빙하기가 있었다. 최후의 빙하기는 75,000년~15,000년 전이었다. 빙하기치고 특별히 혹독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간 중 두 차례의 절정기가 있었는데, 처음은 약 7만 년 전이었고 그다음은 2만 년 전쯤이었다. 대형 디프로토돈은 150만 년도 더 전에 호주에 등장해 열 차례가 넘는 빙하기에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45,000년 전에 사라졌을까? 물론 디프로토돈이 이 시기에 사라진 유일한 대형동물이었다면 이는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프로토돈과 함께 호주 대형동물군의 90퍼센트 이상이 사라졌다. 증거는 정황에 불과하지만, 사피엔스가 마침 이들 동물이 추위로 죽어가고 있던 시기에 호주에 도착한 것뿐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둘째, 기후변화가 대량멸종을 초래할 경우 해양 생명체는 육지 생명체 못지않게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45,000년 전 해양 동물의 개체수가 유의미하게 줄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개입이 원인이라고 하면 멸종의 물결이 왜 육상의 대형동물군을 쓸어버리면서도 인근 바다의 동물상은 내버려 두었는지에 대해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항해술이 일취월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주로 육상의 위협이었으니까.

셋째, 호주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대량멸종이 그다음 수천 년간 인류가 외부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 정착할 때마다 거듭거듭 벌어졌다. 이런 경우들에서는 사피엔스가 유죄라는 것을 반박하기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약 45,000년 전의 소위 '기후변화'에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았던 뉴질랜드의 대형동물군은 인류가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뉴질랜드의 첫 사피엔스 정착자인 마오리족이 그 섬에 도달한 것은 약 8백 년 전이었다. 그로부터 2백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곳의 대형동물 대부분이 멸종했고 모든 조류 종의 60퍼센트도 멸종했다.

북극해 랭겔 섬(시베리아 연안에서 2백 킬로미터 북쪽)의 매머드도 이와 유사한 운명을 맞았다. 매머드는 지난 수백만 년간 북반구 대부분 지역에서 번성했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에는 유라시아로 다음에는 북미로 퍼져나가자 매머드들은 계속 후퇴했다. 1만 년 전이 되자 랭겔 섬을 비롯한 북극해의 외딴섬 몇 곳을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매머드를 단 한 마리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랭겔 섬의 매머드는 몇천 년간 더 번성하다가 약 4천 년 전 갑자기 사라졌다. 인간이 섬에 처음 도착환 바로 그 시기에 말이다.

만일 호주의 멸종이 고립된 사건이었다면, 우리는 인류에게 의문의 여지라는 기회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은 인류를 생태계의 연쇄살인범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호주 정착민들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석기시대 기술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생태계의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귀가 잘 맞는 세 가지 설명이 있다.

호주 멸종의 첫 희생자인 대형동물은 번식 속도가 느리다. 임신 기간은 길고 한 배당 새끼 수는 적으며 임신과 임신 사이의 휴지기가 길다. 그 결과 인간들이 몇 개월마다 디프로토돈 한 마리만 잡는다고 하더라도 사망률이 출생률을 앞지르게 된다. 불과 몇천 년 되지 않는 사이에 최후로 남은 디프로토돈은 사라져 버릴 것이고 그 외 함께 종 전체도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사실 디프로토돈을 비롯한 호주의 대형동물들은 덩치는 크지만 사냥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두 다리로 걷는 공격자들의 공격은 그들에게 전혀 뜻밖의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로아시아에는 다양한 인간 종들이 돌아다니며 2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 왔다. 이들은 사냥기술을 서서히 가다듬어 약 40만 년 전부터는 대형동물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형동물들은 인간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했고, 그래서 새로운 초강력 포식자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로아시아에 등장했을 때 저렇게 생긴 동물로부터는 저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주의 대형동물들에게는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할 시간이 없었다. 인간이 특별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빨이 길고 날카롭지도 않고, 근육이 많고 유연하지도 않으니까. 그러므로 역사상 지구를 거닐었던 최대의 유대류 동물이었던 디프로토돈은 연약해 보이는 유인원을 처음 보았을 때 당연히 힐끗 보고 무시했을 것이다. 먹고 있던 잎을 마저 씹는 일에 열중했을 것이다. 이들 동물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진화시켜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채 사라졌다.

두 번째 설명은 사피엔스가 호주에 도착했을 때 이들이 이미 불을 질러 농경지를 만드는 화전법에 통달한 상태였다고 주장한다. 생소하고 위협적인 환경에 직면한 이들은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무성한 덤불숲을 차근차근 불태워서 탁 트인 초원으로 만들었고, 그런 초원은 사냥감을 좀 더 쉽게 끌어들이는 터라 이들의 필요에 잘 맞았다. 이런 방법으로 이들은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호주 대부분의 생태계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한 증거는 식물 화석이다. 45,000년 전 호주에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드물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도착하면서 이 종의 황금기가 도래했다. 이 나무는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도 금세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다른 나무들이 사라지는 동안 멀리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다. 이런 식생의 변화는 식물을 먹는 동물뿐 아니라 그 동물들을 잡아먹는 육식동물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오직 유칼립투스 잎만 먹는 코알라는 행복하게 잎을 씹으며 새로운 서식지로 퍼져나갔다. 다른 대부분의 동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호주의 수많은 먹이사슬이 붕괴했고, 약한 사슬은 멸종의 길을 걸었다.

세 번째 설명은 사냥과 화전 농업이 멸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하지만 기후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45,000년 전 호주에 닥친 기후변화는 생태계를 뒤흔들어 극히 취약하게 만들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생태계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회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결정적 국면에 인간이 등장함으로써 가뜩이나 연약한 생태계를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기후 변화와 인간의 조합은 대형동물에게 특히 파괴적이었다. 각기 다른 각도에서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여러 위협에 두루 적용될 훌륭한 생존전략을 찾기는 어려운 법이다.

추가 증거가 없는 한, 세 가지 시나리오 중 어느 하나가 맞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호모 사피엔스가 호주나 뉴질랜드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그곳에 아직도 유대류의 사자, 디프로토돈, 대형 캥거루가 살고 있었으리라고 믿을 이유는 충분하다.






"인간이 특별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빨이 길고 날카롭지도 않고, 근육이 많고 유연하지도 않으니까. 그러므로 역사상 지구를 거닐었던 최대의 유대류 동물이었던 디프로토돈은 연약해 보이는 유인원을 처음 보았을 때 당연히 힐끗 보고 무시했을 것이다. 먹고 있던 잎을 마저 씹는 일에 열중했을 것이다. 이들 동물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진화시켜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채 사라졌다."


선해 보이는 얼굴, 부드러운 말씨, 신사적인 매너 앞에서 우리는 경계심과 긴장감을 늦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속아 사기당하고, 폭력을 당하고, 나아가 죽음까지 당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다. 이런 현대 사피엔스의 모습은 마치 처음 보는 인간의 모습에 경계심을 갖지 않아 멸종당한 호주의 대형동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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