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149쪽~152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꼭! 2025.01.10.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132
6. 피라미드 건설하기 160
7. 메모리 과부하 190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208
[필사와 단상]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위의 설명에 따르면 농업혁명은 오산이다. 이것은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다. 역사는 이것보다 훨씬 더 바보 같은 오산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편안한 삶을 추구하다 보니 전환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피엔스에게 다른 열망이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삶을 힘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보통 역사적 발전의 원인을 차가운 경제력, 인구학적 요인에 돌리려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방식과도 잘 맞는다. 현대사의 경우, 학자들은 이데올로기나 문화 같은 같은 비물질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된 증거가 있으니 그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식량부족이나 인구의 증가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증명할 충분한 문서와 편지와 비망록이 있다. 하지만 나투프 문화가 남긴 문서는 없기 때문에, 고대를 다룰 때는 물질주의학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마련이다. 문자 발생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동기가 경제적 필요가 아니라 신앙이었음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드문 경우 진상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아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지역 유적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는 정착지, 주거, 일상 활동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갖춘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개별 돌기둥의 무게는 최대 7톤이었고 높이는 5미터에 달했다. 그 인근의 채석장에서 학자들은 끌로 반쯤 깎다가 만 무제 50톤의 기둥을 발견했다. 모두 합쳐서 몇 개 이상의 기념비 구조물이 드러났는데, 가장 큰 것의 폭은 30미터에 육박했다.
고고학자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이런 기념비적 구조물과 친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스톤헨지다. 하지만 이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2500년의 발달된 농경사회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들은 연대가 기원전 9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바, 이 구조물은 수렵채집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 발견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조사를 거듭할수록 이 구조물의 오랜 연대와 이를 세운 시기가 농경사회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능력과 문화적 복잡성은 우리가 이전에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다.
수렵채집 사회 사람들은 왜 이런 구조물을 세웠을까? 뚜렷한 실용적 목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매머드 도살장도 아니고 비를 긋거나 사자를 피해서 숨는 장소도 아니었다. 뭔가 미스터리한 문화적 이유에서 세워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고학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수렵채집인들은 거기에 막대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
괴베클리 티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작물화한 밀의 기원을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발견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작물화된 밀의 변종 중 하나인 외알밀(작은 이삭에 밀이 한 알씩 달린다-옮긴이)은 괴베클리 테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이 발상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라는 문화적 중심지는 인류에 의한 밀의 작물화, 밀에 의한 인간 길들이기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념물을 건설하고 이용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어쩌면 수렵채집인들이 야생 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정상적인 식량공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기존에 우리는 개척자들이 처음에 마을을 세우고 이것이 번영하면 그 중앙에 사원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괴베클리 테페가 시사하는 바는 그 반대다. 먼저 사원이 세워지고 나중에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시시대, 오직 자연에 기대 살았던 수렵채집인들은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유목민생활을 했던 그들은 아마도 기후 변화에 예민했을 것이다. 기후 변화에 따라 먹거리 채집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그들에게 최고의 중요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사회적 제도나 문명이 없던 그 시대, 샤머니즘은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먼저 사원이 세워지고 나중에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를 뒷받침해주는 이유로 이는 곧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신성한 개입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