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26

제2부 농업혁명/ 6. 피라미드 건설하기(173~178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꼭! 2025.01.10.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132

6. 피라미드 건설하기 160

7. 메모리 과부하 190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208


[필사와 단상]

6. 피라미드 건설하기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의 사회적 질서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원칙은 신들이 읊어준 것이라고 단언한다. 계급제도의 중요성은 엄청나다. 법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개의 성별과 세 개의 계급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뉜다. 사람은 성별과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닌다. 평민 여성의 목숨 값은 30세겔이고, 노예 여성은 20세겔이다. 이에 비해 평민 남성의 눈은 은 60세겔의 가치가 있다.

이 법전은 또한 가족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어린이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부모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어떤 귀족이 다른 귀족의 딸을 죽이면 그 벌로 살해자의 딸이 처형당한다. 우리에게는 살인자는 무사하데 죄 없는 그의 딸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함무라비와 비빌론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정당해 보였다.

이 법전은 만일 왕의 신민 모두가 위계질서상의 자기 자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행동하면 제국에 사는 수백만 명 모두가 효과적으로 협력활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면 사회는 구성원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해서 이를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스스로를 적으로부터 보호하며 더 많은 부와 더 나은 안전을 얻을 수 있도록 영토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함무라비가 사망한 지 약 3,500년 후 북미에 있는 영국 식민지 열세 곳의 주민들은 영국 왕이 자신들을 불공정하게 대한다고 느꼈다. 이들의 대표는 필라델피아 시에 모여, 1776년 7월 4일 자신들은 더 이상 영국 왕의 신민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들의 독립선언은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칙을 선언했는데, 이 원칙은 함무라비의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영감을 내려주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 신이 불러준 가장 중요한 정의는 바빌론의 신들이 불러준 내용과는 상당히 달랐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함무라비 법전과 마찬가지로 미국 독립선언문은 사람들이 그 문서의 신성한 원칙을 따라 행동한다면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동할 수 있을 것이며 공정하고 번영한 사회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함무라비 법전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그 시대의 문서만이 아니었고, 후손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미국의 학생들은 2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것을 베끼고 암송해 왔다.

이 두 문서는 우리에게 명백한 딜레마를 제시한다. 둘 다 스스로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리를 약속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인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반면 바빌론들에 따르면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옳고 바빌론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함무라비는 당연히 자신이 옳고 미국인들이 틀렸다고 받아칠 것이다. 사실은 모두가 틀렸다. 함무라비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평등이나 위계질서 같은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했지만, 그런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는 장소는 오직 한 곳,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 속뿐이다. 이런 원리들에 객관적 타당성은 없다.

우리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는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평등한가? 미국 독립선언문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물학 용어로 한번 번역해 보자.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부여받았다."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 진화했다. 또한 '평등'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평등사상은 창조사상과 뗄 수 없게 얽혀 있다. 미국인들은 평등사상을 기독교 신앙에서 얻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은 신이 창조했으며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신앙 말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신과 창조와 영혼에 관한 기독교 신화를 믿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 모든 사람은 얼마간 차이 나는 유전부호를 가지고 있으며, 날 때부터 각기 다른 환경의 영향에 노출된다. 그래서 각기 다른 특질을 발달시키게 되며, 그에 따라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난다. 따라서 '평등한 창조'란 말은 '각기 다르도록 진화했다'는 표현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생물학에 따르면 사람은 창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여'하는 '창조주' 같은 것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맹목적인 진화과정뿐이며, 개인은 어떤 목적도 없는 그 과정에서 탄생한다. '창조주에게 부여받았다'단순히 '태어났다'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생물학에 권리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기관과 능력과 특질이 존재할 뿐이다. 새가 나는 것은 날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기관과 능력과 특질이 '양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미국 독립선언문의 'unalienable'은 '양도 부가능한'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빼앗을 수 없는'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문맥이 통한다-옮긴이), 이 중 많은 것이 끊임없는 변이를 겪고 있으며,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얼마든지 자연스럽다. 타조는 나는 능력을 잃어버린 새다. 그러므로 '양도 불가능한 권리'란 표현은 '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 특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진화한 특질은 무엇인가? '생명?' 당연하다. 하지만 '자유?' 생물학에 그런 것은 없다. 평등이나 권리, 유한회사와 마찬가지로 자유란 생물학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상이다. 순수한 생물학적 관점에서 민주 국가의 시민과 왕정 국가의 신민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행복'은 또 어떤가? 생물학 연구에서는 지금껏 행복을 명확히 정의하거나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생물학 연구는 쾌락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인정한다. 쾌락은 좀 더 쉽게 정의하고 측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생명과 쾌락의 추구'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미국 독립선언문의 해당 구절을 생물학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게 진화했으며, 이들은 변이가 가능한 모종의 특질을 지니고 태어났고 여기에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가 포함된다."


평등과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은 이런 추론에 격분할지 모른다. 이들은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안다고! 하지만 그 본질만큼은 우리가 모두 평등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안정되고 번영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에 반론을 펼 생각은 없다. 이것이 정확히 내가 '상상의 질서'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니까.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란 사악한 음모도 무의미한 환상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함무라비도 자신의 위계질서 원리를 동일한 논리로 옹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기억해 두자. 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는 귀족, 평민, 노예가 날 때부터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다르다고 믿으면, 우리는 더 안정되고 번영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게 진화했다

실재하지 않지만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믿고 따르는 '상상 속의 질서'는 오랫동안 이어온 관습으로, 또는 강제력으로 명문화된 법질서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질서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자란다. 다소 논리에 어긋나고, 개인적 가치와 맞지 않아도, 협력사회에서 불가피한 사항이라면 우리는 큰 저항 없이 따른다. 그렇다고 흐름에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개개인 나름의 기준과 방식을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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