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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Mar 10. 2018

이반 쿠팔라[2], 동슬라브인의 불타는 하지 축제

009.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3.7.6. 키예프


이반 쿠팔라의 물장난. 물에 사람 빠뜨리기, 자작나무 가지에 물을 묻혀 흩뿌리기, 화관을 물에 던지기, 물에 몸 담그기. ©Lee Myeong Jae


"임자 앞에 세 개의 언덕이 있지 않은가? 이 세 언덕에 여러 가지 많은 화초가 피게 되는 거야. 그런데 임자가 그것을 하나라도 꺾어서는 안 된단 말일세. 다만 고사리에 꽃이 피면 곧 그것을 붙잡는 거야. 그리고 임자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뒤돌아보아서는 안 되네. 알겠나?" (지까니까 근촌 야화 - '태양 감사제 전야' p.340)

                           니콜라이 고골 <지까니까 근촌 야화 - 태양감사제 전야>(출판사 미상, p.340)



이반 쿠팔라의 물장난, 그리고 난장 


호수 주변에서는 물장난이 시작되었다. 과거 동슬라브인은 쿠팔라 무렵부터 강이나 호수에서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의 태양은 물속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가졌고, 그래서 물속으로 들어가야 그와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쿠팔라 밤의 물은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치료, 정화, 보호, 잉태 등 쿠팔라의 물은 불이 갖고 있는 상징과 동일시되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주머니들은 아저씨의 옷을 팬티만 남기고 홀딱 벗겨 물에 빠뜨렸다. 건져 올려주는 척하면서 아저씨를 다시 물에 던져버렸다. 각본에 따른 연기였겠지만, 빠진 사람이나, 빠뜨리는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이나 모두 유쾌해했다. 잔뜩 골난 표정의 아저씨는 이곳저곳으로 헤엄을 치면서 화관을 수거하더니 물 밖으로 집어던졌다. 자기를 물에 빠뜨려 괴롭힌 이들의 화관을 뭍으로 던져서 혼사길을 훼방해야겠다는 심보였을 듯하다. 그리고는 반대 방향으로 얼른 헤엄쳐 그곳을 빠져나갔다. 한 건장한 청년은 자작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뽑아 들고 오더니, 나뭇가지들을 물에 휘저은 뒤 사람들에게 막 뿌려댔다. 정교회 축일에 사제가 물로 축성을 하듯이 물을 흩뿌렸다. 사람들의 탄성과 웃음소리, 박장대소가 끊이지 않았다. 한쪽 편에서는 아주머니 한 분이 어린 아들의 옷을 벗기고 물로 씻기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물 뿌리기 장난의 현대적 변형으로, 도시 한복판에서 무작위로 행인들에게 양동이로 물을 뿌리거나 지나가는 차에 물세례를 퍼붓기도 한다. 


반대편으로 도망쳐 나온 아저씨는 속옷 차림 그대로 숲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난장과 무질서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그곳에서는 소란스러운 음악에 포위된 채, 축일을 주도하는 일부의 가장(假裝)한 무리들과 축제에 나온 소시민들이 뒤엉켜 열광적으로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일탈행위가 인정되고, 웃음으로 양해가 된다. 모두가 일종의 유토피아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무대도 구경꾼도 없고, 모두가 주인이고 참여자였다. 집단적이고 격렬한 접촉과 소통, 경계 허물기를 통해 동슬라브인은 다가올 혹독한 겨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새로운 힘을 얻음으로써 여름과 유쾌하게 이별한다.  


이반 쿠팔라의 밤, 밤새 이어지는 흥겨운 춤과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 두려움을 잊는다. ©Lee Myeong Jae


이반 쿠팔라의 절정 - 모닥불 뛰어넘기 


북새통의 현장을 벗어나 잠시 한숨을 돌렸다. 해가 어스름해지면서 지푸라기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장정 몇 명이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고, 축제 본 행사의 개시를 알리기 위해 높은 장대 위에 감긴 짚을 불태웠다. 장대 앞에 선 사람들은 “타라, 타라.”를 주문처럼 읊으면서 불타는 지푸라기에 팔을 흔들어 부채질을 했다.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매캐한 연기에 점점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동슬라브인의 정화의식에는 불뿐만 아니라 연기가 이용되기도 했는데, 마을과 집, 농사짓는 들판에서 연기가 악한 기운을 멀리 쫓아내는 힘을 갖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높은 말뚝을 세운 후 위쪽에는 타르 나무통이나 수레바퀴를 끼우고 아래쪽은 짚으로 에워싼 후 불을 붙이고, 낡은 외투, 짚신, 옷, 뼈, 병자의 옷들을 같이 태워버렸다고 한다. 

주변이 연기로 가득 차자 본격적인 모닥불 뛰어넘기 의식이 시작되었다.    


장대에 감긴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고 "타라, 타라."를 주문처럼 외치면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사람들. ©Lee Myeong Jae


이반 쿠팔라의 메인 행사인 모닥불 뛰어넘기가 시작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은 태양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닥불 뛰어넘기는 일종의 정결의식, 또는 치료 의식이다. 의식을 동반한 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고대 동슬라브인들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알곡이 무르익어가는 시기가 되면 악한 영혼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인간 세계에 큰 해를 입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예방하거나 이겨내기 위한 정화의식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은 불을 뛰어넘음으로써 병과 불행, 악한 기운을 쫓아내고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나기를 기대했다. 여인들은 불임을 치료하기 위해서 모닥불을 뛰어넘었고, 청춘 남녀가 손을 잡고 불을 뛰어넘으면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모닥불을 뛰어넘기만 하면 그 해에 지은 죄들이 다 없어진다는 속설도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놀이인 이 모닥불 뛰어넘기에 누군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불임 등 지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치료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갖고 동참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다 싶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쿠팔라 전야 의식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수행해야만 마을 전체의 안녕이 보장된다고 믿었고 가축들까지 데리고 와서 함께 불을 뛰어넘었다고 하니 이 행사가 얼마나 소란스러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와중에 한 우크라이나 남자가 한국말로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자신을 발레리라고 소개한 그는 키예프에 있는 어떤 한국기업 지사에 근무하고 있고, 서울 소재 K대학교에서 1년 간 한국어를 배웠다고 했다.  


“왜 불을 뛰는지 아세요? 나쁜 것을 없애기 때문이에요.” 


서툰 한국어였지만, 우크라이나인으로부터 한국어로 축제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합시다!”  


하더니 내 손을 덥석 잡고 모닥불로 향했다. 그리고는 함께 불을 뛰어넘었다. 남자와 손을 잡고 불을 뛰어넘은 것이 뭐랄까, 예상치 못한 일이기도 하고 다소 아쉽기도 해서 다시 한번 뛰어보고 싶었다. 마침 기숙사 옆방에 사는 비비안나를 우연히 만나서 같이 한 번 모닥불을 뛰어넘었다. 이것도 삼세번 해야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혹시 두 번만 뛰어서 몇 시간 후 카메라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봉변을 당한 건 아닌가 모르겠다. 높이 뛰면 뛸수록 효과가 있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높이 뛰려고 애썼다. 즉석에서 짝을 찾아 함께 불을 뛰어넘고는 ‘감사합니다’ 하면서 헤어지는 젊은 남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치마 차림에 속옷이 보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열심히 불을 뛰어넘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한 손은 아빠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엄마 손을 잡고서 불을 뛰어넘는 어린아이, 포대기로 싼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진짜 우크라이나 어머니들을 보면서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뛰는 이들도 지켜보는 이들도 즐겁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비안나와 같이 온 디나는 어머니가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인데, 캐나다에서는 이렇게 불을 뛰어넘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하면서 누구보다 유쾌하게, 누구보다 많이 모닥불을 향해 달려갔다. 만약을 대비해 질서 유지를 도모하는 경찰들도 눈에 띄었다. 매년 이 과격한 불놀이로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이 모닥불 뛰어넘기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더 태울 장작이 없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이반 쿠팔라의 모닥불 뛰어넘기 ©Lee Myeong Jae



불타는 수레바퀴 굴려 물에 빠뜨리기 - 여름과의 이별 의식 


쿠팔라 축제가 절정에 다다르면, 여름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의식을 한다. 불 붙인 큼직한 수레바퀴를 언덕 위에서 굴려 아래쪽 호수에 빠뜨리는 것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불타는 수레바퀴가 물에 빠져 죽는다. 여름은 정점을 지나 겨울을 향해 시나브로 간다. 동슬라브인의 봄맞이 축제인 마슬레니차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블린, 즉 얇은 펜케이크를 손에 들고 장난을 치면서 봄을 환영하는데, 이반 쿠팔라에서도 숭배의 대상인 태양을 조롱하듯 불에 태워 익사시키는 익살을 부리며 여름을 떠나보낸다. 축제도 참 문학적이다. 바로 그 마지막 의식에서, 다음날 세례 요한 탄생일에 내 이름이 신문 지면을 장식할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언덕 위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첫 번째 수레바퀴를 굴려서 호수에 빠뜨렸다. 우르르르 풍덩. 문제는 두 번째 수레바퀴였다. 비탈길을 내달리던 수레바퀴는 바닥 돌에 퉁 한 번 튕기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나를 향해 맹렬히 구르기 시작했다. 피사체인 수레바퀴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면서 몸을 오른쪽으로 서서히 틀어야 하는데, 몸을 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수레바퀴가 잘 보였고, 크기도 점점 커졌다. 당황스러웠다.     

필자를 향해 굴러오는 불타는 수레바퀴. ©Lee Myeong Jae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잽싸게 몸은 피했지만, 삼각대와 거기 달린 비디오카메라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쿵. 내동댕이 쳐진 비디오카메라의 빨간색 녹화 등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놀라운 프로정신을 소유한 카메라다. 알렉산드르 아저씨가 달려오셨고, 심하게 꾸중을 하셨다. 거보라고, 더 옆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했잖냐고. 그러고는 그래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란다. 불타는 수레바퀴는 호수에 정확하게 빠져서 가라앉았다. 그게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다. 한바탕 소란으로 외지인인 나 때문에 축제에 흠집이 나고 판이 깨진 것은 아닌가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 뻔했다. 하지만, 걱정도 잠깐.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또다시 모닥불을 뛰어넘으러 우르르 몰려갔다.


이반 쿠팔라의 깊은 밤으로 


이바노프의 밤은 마법과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이날 밤에는 말을 방목하거나 밖에 두지 않았고, 송아지는 꼭 어미소와 함께 밤을 보내도록 했다. 사악한 기운이 사람과 가축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엉겅퀴와 쐐기풀을 창문에 걸었다. 어부들은 쿠팔라 밤에 강 수면이 은광석으로 얇게 덮인다고 믿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 년 중 유일하게 이날 밤에만 양치식물, 쉽게 말하면 고사리가 꽃을 피우는데, 그 꽃을 발견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를 뿐 아니라, 그 꽃 자체가 주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서 사람들은 밤새 있지도 않은 고사리 꽃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고대 동슬라브인들은 쿠팔라의 꽃과 풀이 특별한 치료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기도 했다. 그래서 이날 새벽 이슬이 바싹 마르기 전에 풀이나 꽃을 채집해서 성물처럼 집에 보관했다. 그러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이 풀을 태워 연기를 맡게 했고,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에는 번개가 집을 때리지 못하도록 페치카에 던지기도 했다.    


이반 쿠팔라 축제의 흥겨움 속에 잠시 지친 몸을 달래고 있는 젊은이들 ©Lee Myeong Jae


밤이 깊어질수록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취기와 흥분상태는 고조되었다. 음악소리와 춤, 환호성도 멈추지 않았다. 모닥불을 뛰어넘는 정결의식 후에 젊은 커플은 숲 속이나 헛간으로 가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저쪽에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사진을 찍으러 다가가는 사이 입술이 떨어졌길래 실례를 무릅쓰고 정중히 부탁을 했다. 한 번 더 해달라고. 그랬더니 다시 키스 삼매경에 빠진다.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건넨 고맙다는 인사말도 못 들은 듯하다. 오히려 저쪽이 나한테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슬라브 민족의 축제, 결혼식과 같은 축일의 매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네버엔딩’이라고 할 수 있다. 끝없이 먹고, 춤추고, 마시고, 얘기하고. 심지어는 잔칫날 주먹다짐을 하고 화해하는 것도 예사다. 오늘 행사도 공식적으로는 밤 11시까지 진행된다고 되어 있지만, 언제 파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전날 드녜프르 강변 기드로파크에서 진행된 전야행사도 새벽까지 진행되었다고 했다.   

밤새 사랑을 속삭일 대상도 없고 사진도 찍을 만큼 찍고 이제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비를 추스르고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 소녀들이 원무를 추던 자작나무 곁에서 한 가족이 나뭇가지에 리본을 매달고 있었다. 리본을 묶으며 마음속으로 소원을 비는 것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께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으니, 비밀이라며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고만 하신다. 그 소원들이 쑥쑥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다. 일 년 중 태양의 힘이 가장 세다고 하는 오늘, 나 역시 태양의 기운을 양껏 받고 유쾌하게 여름을 떠나보낸다. 그래서인지 앞으로 다가올 길고 긴 겨울을 잘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고, 추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도 다소 잦아든 것 같다. 

이반 쿠팔라의 연인들 ©Lee Myeong 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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