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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Mar 05. 2018

이반 쿠팔라[1], 여름과의 요란스럽고 유쾌한 이별의식

008.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3.7.6. 키예프

이반 쿠팔라 축제에서 만난 요정같은 우크라이나 소녀. 15년이 지난 지금 소녀는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Lee Myeong Jae
지금과 같은 추위라 하더라도 입을 거리와 난방시설이 빈약했던 천 년 전 동슬라브인들에게는 겨울이 훨씬 더 혹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따뜻함은 그리움의 대상이었고, 봄은 반가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마슬레니차 축제를 통해 호들갑스럽게 봄을 맞이하고, 이반 쿠팔라 축제를 통해 요란스럽게 여름과 작별한다


흰 구름과 회색 구름 사이로 크고 작은 파란 구멍들이 듬성듬성 보이는 하늘에서는 한 두 방울 비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열기는 하지(夏至)다웠다. 싱겁지 않은, 진하고 뜨거운 여름이 우크라이나에도 있다. 마르슛카(미니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었을 뿐인데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소설가 고골의 그로테스크한 표현 방식을 빌려본다면, ‘몸에 붙은 카메라 장비들이 갑자기 땀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기계들이 뿜어내는 땀에 휩쓸려 흑해 어디론가 떠내려갔다.’고 해도 될 만큼 더운 날씨였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남쪽 끝 언저리에 자리한 작은 마을 피로고보. 마을 초입에 위치한 야외박물관은 오늘 밤 질펀하게 놀아보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사람들로 이미 북적대고 있었다. 우리네 민속촌과 닮은 이 박물관의 공식 명칭은 The Museum of Folk Architecture and Life of Ukraine으로,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고유의 전통·민속 문화를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곳이다.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명칭, 날짜와 시간이 적힌 안내문이 붙는데, 이제는 “와서 구경하시오.”가 아니라 “와서 함께 놀아봅시다.”라고 그 행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세례 요한과 쿠팔라의 만남 


동슬라브인에게 쿠팔라 Kupala는 수확과 열매를 가져다주는 여름 신(神)인 동시에 하지 축제다. 자연재해, 특히 물과 불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숭배하는 민간 축일이었기 때문에 쿠팔라 축제는 물, 불과 특별한 관련을 갖고 있다. 쿠팔라에 ‘이반’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키예프 공국이 988년 비잔틴으로부터 기독교, 즉 정교회를 받아들인 이후였다. 그전까지 동슬라브 민족은 번개 신 페룬을 숭배하고 태양신 호르스를 섬겼다. 이반은 요한 John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정교회력으로 6월 24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 7월 7일은 성경 속 인물인 세례 요한이 태어난 날이다. 그리스도의 탄생 6개월 전인 이 날은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인 하지였다.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며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고, 그리스도에게 직접 물로 세례를 주었던 요한은 쿠팔라 축일과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물과 불, 정화의식과 관련된 동슬라브인의 민간축제 쿠팔라는 기독교 수용과 더불어 이렇게 이반과 짝이 지어졌고, 이 날을 이반 쿠팔라, 또는 이바노프의 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론 교회 의식의 격하, 강한 민간신앙적 특성, 통음 난무 등의 이유로 정교회는 이 축제를 금지했지만 말이다. 


이반 쿠팔라 축제에 참여한 가족. 우크라이나의 축제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강권하는 보드카를 마시고 본의 아니게 음주 촬영을 하게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Lee Myeong Jae


이반 쿠팔라의 시공간 속으로 


이반 쿠팔라의 시공간 속으로 들어온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화관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 들풀과 들꽃으로 엮어 만든 순수 자연산 화관이었다. 꽃과 풀을 꺾어간 풀밭에서는 풀 비린내가 솔솔 풍겼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누군가의 가족, 연인, 친구들이었다.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유쾌함이 차고 넘쳤다. 멀리서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아저씨가 보였다.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저씨 이름을 불렀다. 알렉산드르 아저씨는 비디오 촬영기사인데, 카메라를 들고 키예프 이곳저곳을 방황하다가 알게 되었다. 아저씨는 오늘 축제가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부칭이 이바노비치인 것을 보니 아저씨 아버지의 이름이 이반, 아저씨 아버지의 날이네요.” 


별 싱거운 농담을 다 한다는 듯, 아저씨는 말 대신 소박한 미소를 건네신다.  

오후 다섯 시 무렵. 비가 그치더니, ‘나, 하지 축제야’라고 과시라도 하듯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다. 하루 종일 구름 뒤에 숨겨온 에너지를 한꺼번에 분출하는 것 같았다. 사실, 한 두 방울 비 때문에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사진기와 비디오카메라가 비에 젖지 않게 된 것도, 그리고 빠른 셔터 속도를 얻게 된 것도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무튼, '이바노프 날의 비는 금맥보다 좋다'는 말이 있는데, 많은 양의 비는 아니었지만 농부들에게는 무척 반가웠겠다 싶었다.   


이반 쿠팔라 인형 ©Lee Myeong Jae


물 뿌리기 장난 - 축제의 시작  


나뭇가지를 엮어 허술하게 세워놓은 n자형 문 앞에서 요상한 복장의 할머니 한 분이 장난을 시작한다. 할머니는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신나게 물을 뿌렸다. 정교회 사제가 세례, 또는 축성을 하듯이 나뭇잎이 달린 나뭇가지에 물을 찍어 바른 다음 사람들을 향해 흩뿌렸다. 물세례를 맞기 싫으면 멀찌감치 돌아가면 될 것을, 싫은 표정을 짓다가도 결국에는 꺆꺆 소리를 지르며 좋다고 물을 맞는다. 문을 통과하고는 진한 키스를 하면서 한참 동안 물세례를 받은 연인도 있었고, 진지한 표정으로 손자 둘을 양 팔에 하나씩 끼고 물세례를 받으며 문을 지나가는 할머니도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시끌벅적 사람들에게 물을 뿌려내며 장난을 하고 있다. ©Lee Myeong Jae


마레나 조롱하기 


하얀 옷을 입고 화관을 쓴 한 무리의 소녀들과 사람들이 마레나와 쿠팔라 인형을 앞세우고 자작나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쿠팔라와 남매이면서 부부이기도 한 마레나는 고대 동슬라브인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대상이었고, 동시에 배고픔, 고통, 죽음, 겨울의 여신이었다. 오늘 축제에서는 한쪽 눈동자가 비정상인 우스꽝스러운 인형을 마레나로 설정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마레나를 죽음과 악의 신인 마라라고도 불렀고, 짚으로 만들어서 태워버리기도 한다. 노파 한 사람이 기다란 막대에 마레나를 매달아 높이 흔들면서 ‘우~우~’ 야유하듯 소리를 냈다. 이는 동슬라브인들이 죽음의 인형을 흔들어 조롱하고 불태움으로써 곧 닥쳐올 혹독한 겨울, 배고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볍고 유쾌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이반 쿠팔라 축제를 통해 긴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어 갔다.  


마레나 인형 조롱하기(좌), 마레나 인형에게 꽃을 한아름 안겨주고 포즈를 취한 우크라이나 할머니들(우) ©Lee Myeong Jae


이반 쿠팔라와 생명력 


소녀들은 과자, 리본, 촛불, 화관 등으로 자작나무를 장식하고 원무(圓舞)를 추었다. 우리의 강강술래와 유사한 원무는 사실 사람들이 사는 곳 어는 곳에서든 볼 수 있는 춤이다. ‘끝도 시작도 없는’ 원 모양을 만들어 춤을 추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원과 불멸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명력과도 연결이 된다. 자작나무는 남성성을 상징한다. 자작나무를 가운데 두고 소녀들이 원무를 추는 형상은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소녀들이 머리에 쓰고 있던 원형의 화관을 던져 자작나무 가지에 거는 것도 유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수태, 새로운 생명, 출산을 기원하면서 가락지 빵이라고도 부르는 반지 모양의 바란카를 실에 매달아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실제로 이반 쿠팔라의 밤은 혈기왕성한 처녀총각들에게 첫 경험의 밤이 되었다. 이는 정교회가 쿠팔라 축제를 금지하는데 주요한 연유가 되기도 했다.   


자작나무를 가운데 두고 원무를 추는 사람들(위). 한 소녀가 화관을 던져서 자작나무 가지에 걸고 있다(아래, 좌) ©Lee Myeong Ja


화관으로 점치기 

 화관을 떠내려보내는 소녀들 ©Lee Myeong Jae

소녀들은 물가로 갔다. 화관을 벗어 수면 위로 조심스럽게 던졌다. 화관이 흘러가는 방향에 있는 마을에 미래의 배우자가 살고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소녀들은 언젠가 들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멋진 오빠가 살고 있는 마을 쪽으로 화관이 떠내려 가도록 열심히 물장구를 쳤을 것이다. 화관에 불붙은 초를 꽂아 내려놓기도 했다. 만약에 화관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화관의 주인은 그 해에는 결혼을 못할 것이라고 한다. 과거 동슬라브 여인들은 결혼할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양가 부모와 매파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결혼은 사랑과 새로운 삶에 대한 낭만과 기대이기도 했지만, 결혼식 중에 신부는 남편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 신랑의 신발을 벗기는 의식이 있었을 만큼 여성들에게 결혼은 자유와 젊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집을 떠나 낯선 남자의 가족과 평생을 살아야 하는 소녀들에게 결혼은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점치기 놀이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그것을 유쾌하고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놀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요정과 같이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소녀를 만났다. 예전에 세노코스 축제에서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정말 넋이 나갔던지, 한쪽 발이 물에 빠져 젖는 줄도 모르고 셔터를 눌렀다. 사이렌의 목소리에 홀려 바다에 뛰어드는 게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반 쿠팔라[2]에서 계속...


소녀들이 호수에 던진 화관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Lee Myeong 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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