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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Feb 25. 2018

벨라야 체르코비 - 로시 강에서 찾은 루시

007.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3.10.3.

벨라야 체르코비를 지나는 로시 강. 드녜프르 강의 지류이며, 총 길이는 346km. ©Lee Myeong Jae

 

고대 동슬라브 민족은 A.D.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느슨한 연방 형태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 키예프 루시라고 한다. 키예프 루시의 종주국은 키예프 공국(公國)이었고, 키예프의 공후는 대(大)공후로서 수위권을 갖고 있었다. 이 연방체의 구성원이 된 동슬라브 부족들은 자신들을 루시라고 불렀고, 주변 부족들은 키예프 루시를 루시 인들의 땅이라고 했다.


'루시'라는 명칭이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지에 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키예프 루시를 건설한 것은 바이킹, 즉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인이라고 주장하는 노르만 학설 옹호자들은 루시가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핀란드어 루오치 ruots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반면, 슬라브 학설 지지자들은 스칸디나비아의 바랴크인들이 이 땅에 발을 딛기 전인 A.D. 6세기부터 동슬라브인들이 로시 강 유역의 로시 부족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그때부터 이미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루시 명칭의 기원을 로시 강에서 찾는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벨라야 체르코비. 키예프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로시 강변에 자리한 인구 20만의 자그마한 도시다. 역사책에 문자로 박혀 있는 로시 강이 아닌 진짜 로시 강을 보고 싶었다.

태양이 잿빛 구름 사이로 어살프게 들락날락하더니, 출발하자마자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졌다. 
벨라야 체르코비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바로 알렉산드리아 공원으로 가는 마르슈트카에 올라탔다. 총알택시 마냥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 마르슈트카는 이내 비구름을 따돌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미니버스 승객도 달랑 나 혼자였다. 공원에 도착해서 방향이라도 물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10분이나 달렸을까, 운전기사 아저씨가 저기라며 내리란다. 맞은편에 정문처럼 보이는 입구가 보였다. 다행이었다. 뜬금없는 외국인 한 명 때문에 본전은커녕 기름만 낭비한 게 분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운전기사 아저씨는 내가 내리자마자 화풀이라도 하듯 액셀 페달을 있는 힘껏 밟으며 되돌아갔다.

알렉산드리아 공원 정문(좌측 첫번째), 도시 안내판 <1032년 벨라야 체르크바. 야로슬라프 무드리가 세운 도시>(우측 첫번째) ©Lee Myeong Jae

 

하얀 교회 White Church라는 뜻을 가진 벨라야 체르코비의 원래 이름은 유리예프였다.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야로슬라프 대공이 1032년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유리예프라 불렀다. 유리는 야로슬라프 대공의 세례명이었다. 유리예프는 아마도 키예프 루시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였을 것이다. 지금도 벨라야 체르코비는 키예프에서 크림반도나 오데사로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다. 바꿔 말하면, 남방 유목민들이 키예프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넘고 가야 하는, 키예프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요충지다. 과거 로시 부족이 정착해서 힘을 키우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고 하는 말에 무게를 실어줄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한 장소일 수 있겠다 싶었다.


알렉산드리아 공원을 가로질러 로시 강에 도착했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소 실망스러웠다. 본류인 드녜프르 강에 비하면 그다지 볼품없었다. 강폭이 넓지도, 유속이 빠르지도 않았다. 대자연이 주는 어떤 감동도 없었다. 폭이 3m도 채 안 되어 보이는 목조 다리 하나가 위태롭게 떠 있었다. 자전거와 손수레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걸 보면 나름 튼튼하게 만들긴 했나 보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어두웠다. 언제 다리가 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소도시가 품고 있는 무료함이나 무력감 때문이었을까. 사실, 21세기 초반, 우크라이나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냉소, 절망, 상실이라는 단어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항상 마음이 아팠다.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나. 


로시 강 위의 목조다리를 지나고 있는 주민들 ©Lee Myeong Jae
로시 강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좌측), 로시 강의 목조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 벨라야 체로코비 주민들(우측) ©Lee Myeong Jae


로시 강변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평화로움이 온몸으로 밀려들어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느낌이었다. 강물은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고요하게 숨을 쉬었다. 강변에 빼곡히 자리 잡은 수초들은 마치 물 위에 초록 매트리스를 깔아놓은 것 같았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나무들은 폭신한 쿠션처럼 보였다.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된 듯했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강변 숲지대를 빠져나오자마자 주변이 탁 트인 널찍한 공간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평범하고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 자체였지만, 내 입에서 짧은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와우.” 드디어 무언가 찾아야 할 것을 찾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여기가 바로 천년 전 루시 부족이 삶의 터전을 일군 그곳이구나. 그들이 걷고, 달리고, 춤추고 노래하던 그 땅을 밟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괜스레 제자리에서 사뿐 한 번 뛰어본다. 당장이라도 땅을 파내려가면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팔은 역시 안으로 굽는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완벽하게 시비가 가려지지 않을 거라면, 나는 슬라브 학설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생명력 가득한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거침없는 삶을 살았을 동슬라브 민족이 ‘우리 땅은 넓고 풍요롭지만, 질서가 없으니 와서 다스려 달라.’면서 구걸하듯 바랴크인, 바이킹을 통치자로 초빙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로시 강변의 초원지대. 과거 로시 부족은 로시 강 유역에 정착해서 힘을 키우고 세를 확장했을 것이다 ©Lee Myeong Jae
알렉산드리아 공원에 소풍 온 학생들과 교사.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다. ©Lee Myeong Jae


벨라야 체르코비까지 와서 로시 강만 보고 알렉산드리아 공원을 지나칠 수 없었다. 로시 강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편안하게 산책을 좀 하려고 했더니, 후두두둑. 아까 총알 마르슈트카로 따돌렸던 비구름이 이제야 도착했는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체로 나들이 나온 선생님과 학생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우르르 옆을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아이들의 밝은 얼굴. 비를 맞으며 좋아라 소리치며 뛰어가는 그 환한 표정들을 보니, 마치 비를 학수고대하던 숲의 초목들이 기뻐서 뿌리째 튀어나온 것 같았다.  

알렉산드리아 공원은 1793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와 친분이 있었던 폴란드 귀족 크사베리 브라니츠키가 벨라야 체르코비에 자신의 겨울궁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교외에는 알렉산드리아 공원이 딸린 저택을 지었다. 브라니츠키 아내의 이름이 알렉산드라였다. 그런 날이 올까 모르겠다만, 내 수중에도 넉넉한 돈이 쌓이면, 아내 이름을 딴 공원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당시 프랑스의 조경 전문가가 이 공원을 디자인했고, 유럽에서 다양한 식물들을 수입해 심었다고 한다. 화려한 건축물과 조각상들로 꾸며진 알렉산드리아 공원은 19세기 내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로 꼽혔다. 문득 공원 입구에 걸려 있던 솁첸코와 푸시킨의 청동상이 문득 떠올랐다.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지식인인 솁첸코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열혈 시인 푸시킨이 이 낭만적인 명소를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다.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딴 공원까지 만든 것을 보면, 당시 이곳이 로시 강 구간에서 가장 물 맑고 경치 좋은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지금 알렉산드리아 공원은 화려했던 과거를 연상하기 어려울 만큼 음산했다. 여러 종류의 나무와 식물들은 여전히 무성했지만,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원시적인 분위기가 느껴졌고 각종 인공물들은 대부분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마치 인공물에 대한 자연계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쌓인 낙엽 위로 여린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소리, 낙엽 위로 낙엽이 내려앉는 소리,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 밑에서 들려오는 서럭서럭, 적적 젖은 낙엽 밟는 소리가 좋았다. 조용한 곳에 홀로 있으니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비가 멈춘 줄도 모르고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흘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비 소리로 들려 계속 우산을 들고 다녔다.  

알렉산드리아 공원 내의 18세기 건축물. 물을 쏟아내는 작은 계단 폭포가 다소 안스럽게 느껴진다 ©Lee Myeong Jae


공원 안에서 길을 잃었다. 아주 넓다고는 할 수 없는 2 제곱킬로미터의 공간이었지만 당최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방치(方癡) 맞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무슨 검사를 했는데 공간지각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지도로는 목적지만 확인하고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거기가 한국이건, 러시아건, 우크라이나건 어차피 방향을 잡지 못하니까. 그 대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방향은 물론, 요긴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물론, 구소련 지역에서는 거리 개념이 우리와 다른 탓에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는 말에 속아 한 시간도 더 걸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는 걸 보니 그래도 목표 지점에 꽤 근접해 있나 보다. 산책 중인 듯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출구를 물었는데 동문서답을 하신다.


“이 지역에는 화학공장이 하나 있고, 체르노빌 사건이 터졌을 때 여기는 제4구역에 해당되었었지…….” 

지나던 다른 할머니 한 분께 다시 여쭤봤더니, 

“며칠 째 비가 와서 버섯이 많이 자랐다우. 저어 저기 많이 있으니 따 가서 드시오.” 

라고 딴소리를 하시며 큼직한 버섯 두 덩이를 손에 쥐어주셨다. 내 뒤를 따라 걸어오던, 외지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이 정말이냐 반색하며 버섯을 찾으러 바로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알고 있지만, 외지인에게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엉뚱한 소리만을 하기로 모의한, 그런 곳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터질 듯 버섯을 가득 담은 가방을 자전거 양 손잡이에 하나씩 매달고 쌩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을 간신히 멈춰 세워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맘 좋은 할머니에게는 죄송했지만 손에 들려준 버섯들은 슬쩍 길가에 버려졌다. 얼마 전 산에서 채취한 버섯을 잘못 먹고 한 가족이 몰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다른 식물보다 방사능을 더 많이 흡수한다는 딸기와 버섯을 가급적 피하라는 말을 항상 듣고 지내왔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집에 가져간다 해도 요리해 먹을 방도도 없었지만, 여하튼 벨라야 체르코비도 체르노빌에서 20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공원 ©Lee Myeong Jae


키예프로 돌아가는 마르슈트카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적막한 도심을 거닐었다. 유리예프는 13세기 몽고 타타르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고, 1363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569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으로 편입되었다.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이런 복잡다단한 역사와 마주할 때마다 과연 우크라이나의 실체가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이렇게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도시 자체가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18세기 말 폴란드 귀족 브라니츠키의 후원으로 건축된 담백한 자태의 세례 요한 교회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교회는 약간 푸르스름한 빛을 띤 하얀색 외벽을 갖고 있다. 14세기 무렵 유리예프 재건 당시 우연히 숲 속에서 폐허가 된 하얀색 교회를 발견했고, 그 때문에 도시 이름을 벨라야 체르코비로 바꾸었다고 한다. 세례 요한 교회 외부를 흰색으로 칠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이 교회는 원래 가톨릭 성당이었지만, 1861년부터는 러시아 정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강제적인 조치였다. 교회 간판을 보니 지금은 다시 로마-가톨릭 교구로 되돌아간 듯하다. 입구에 각종 전시회와 콘서트 안내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주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세례 요한 교회 ©Lee Myeong Jae
구세주 변모 대사원(좌측). 대사원 내에 있는 성경 속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을 묘사한 성화(우측) ©Lee Myeong Jae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가가린로(路)에서는 1839년 최초 완공된 구세주 변모 대사원의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대사원 외벽과 기둥도 하얀색이었다. 대사원 내부에는 거대한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야고보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나고, 옷은 빛처럼 희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 위를 덮고, 그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며 기뻐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며 무서워하였습니다. <아가페 쉬운성경> 마태복음 17장 중 


이렇게 긴 성경구절을 단박에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는 그림이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던 가난한 농민들에게 성화는 한편의 감동적인 설교였고, 신과의 대면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였다. 마침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노릇한 햇살이 그림 속 인물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듯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왔다. 루시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뿌듯함과 더불어 허기가 밀려왔다. 우크라이나 음식이 먹고 싶었다. 갈랴네 전화를 했다. 갈랴 엄마 레샤는 남편 지마와 갈랴가 곧 도착한다며 먹을 건 없지만 오라고 하신다. 우리식으로 하면 숟가락만 하나 더 놓을게. 그렇게 말해주니 덜 미안했다. 어느새 이렇게까지 뻔뻔해졌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보르시, 보드카, 흑빵과 살로-돼지비계를 먹으며 갈랴 가족과 늦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체르노빌 사건 당시 소방관으로 투입되었던 지마 아저씨에게 그때 이야기를 조금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오늘도 입을 절대 열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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