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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Feb 17. 2018

포돌 - 빛바랜, 그러나 여전히 살아 숨쉬는 키예프

006.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포돌에서 만난 젊은 연주자들. ©Lee Myeong Jae


안드레옙스키 스푸스크의 내리막 끝은 포돌과 맞닿아 있다. 여행자의 시공간에서 막 빠져나와서인가. 갑작스레 공기가 거칠어졌다. 번잡스럽다. 치열한 삶의 시공간으로 옮겨온 듯하다. 바쁘게 내딛는 발걸음, 고단한 눈빛, 추위로 잔뜩 찡그린 얼굴,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손. 꿉꿉하고 축축한 냄새까지. 무언가 상실감과 생기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포돌은 원래 키예프 공국의 수공업자, 장인,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들은 공후와 귀족의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하고 물건을 공급했다. 포돌은 13세기 키예프 공국의 몰락과 더불어 쇠퇴했지만, 17세기부터 다시 활기를 찾으면서 키예프의 무역 및 상업 중심지로 부상했다. 1811년 7월, 대화재가 포돌을 덮치기 전까지 키예프 전체 주택의 약 60%가 이곳에 몰려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번화가였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나서는 자본과 정책이 키예프 도심으로 우선, 집중되면서 포돌은 여전히 과거 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 놓고 보니, '그래, 바로 이 느낌이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892년, 러시아 제국 내에서 최초로 트람바이 tram, 궤도전차가 운행된 곳이 바로 포돌이었다. 베를린, 부다페스트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였다고 하니, 키예프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혁명 이후 이 트람바이 시스템은 레닌의 전기화(電氣化) 계획과 맞물려 소련의 주요 도시마다 전파되었고, 트람바이 운전기사는 구소련의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선망하는 직업이 되었다. 혹자는 트람바이를 투박한 쇳덩이라고 하는데, 나에게 트람바이는 그저 낭만적인 교통수단이기만 하다. 키예프 도심에서는 운행이 중단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포돌에 가면 여전히 트람바이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 희소성 때문에 포돌이 더욱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도시 한복판에서 멸종위기의 육중한 짐승과 조우한 것 같은. 마음이 답답할 때면 가끔씩 계약 광장 지하철역에 내려 아무 트람바이에나 올라탔다.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느릿느릿 키예프를 반 바퀴 돌고 나면, 덜컹거림에 답답함이 털려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 무게감에 비하면 내 고민은 가벼운 스쿠터 정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작정 승차한 트람바이가 드녜프르 강을 건너는 차량인 경우는 특히나 운 좋은 날이다. 그것도 해질 무렵에. 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살며시 넋을 놓게 된다.


어느 날 문득 트람바이가 구소련의 시스템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앞선 차량을 추월할 수도, 양껏 달릴 수도 없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후진 역시 불가능하다. 앞에 가던 트람바이가 고장이나 사고라도 나면, 뒤따라오던 전차들은 앞차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990년대부터 트람바이는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하고 교통사고를 빈번히 유발하는 애물단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키예프에서 트람바이를 완전히 퇴출시킬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어쩌면 포돌에 덩그러니 궤도의 흔적만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포돌을 달리는 트람바이. 저 멀리 키예프 고지대에 안드레이 교회가 보인다. ©Lee Myeong Jae


포돌 지구 한가운데에는 계약 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18세기 말, 이곳에 일종의 무역센터라고 할 수 있는 계약관(契約館, Contracts House)이 들어서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키예프에서 이루어지는 대다수의 계약 체결과 조인식은 이 계약관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따금씩 계약관은 콘서트홀로 사용되기도 했다. 1847년 키예프를 방문한 프란츠 리스트가 이곳에서 연주회를 했었고, 푸슈킨과 고골, 프랑스 작가 발자크도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작가들은 여기를 왜 왔었을까? 당시 계약관은 키예프에 가면 꼭 가봐야 할 명소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무역, 음악, 계약, 문학. 조금은 난해한 조합이다.   


계약 광장에서 드녜프르 강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계약관과 비슷한 분위기가 나는 연노랑색 건물을 볼 수 있다. 크기로 보면 계약관의 큰 아버지뻘 정도 될 것 같다.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이 건물은 키예프 수좌 대주교였던 표트르 모길라(우크라이나어로는 페트로 모힐라, 1596-1646)의 후원으로 탄생한 동슬라브 민족 최초의 고등교육기관,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 Kiev-Mogyla Academy다. 공개적으로 친서구, 친유럽을 표방하는 학교다. 국립대학교인 이 아카데미의 전신은 키예프 형제애 학교와 키예프 동굴 수도원 부속학교의 통합으로 1632년 개교한 키예프-모길라 신학교 Collegium이다. 이후 1694년 이 신학교는 러시아제국의 차르 이반 5세로부터 아카데미로 인정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키예프 형제애 학교가 설립된 1615년을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의 개교 연도로 보는데, 모스크바국립대학교(1755)와 키예프국립대학교(1834) 보다도 훨씬 긴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7세기 폴란드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1661년 문을 연 르보프대학교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학문적 전통은 여느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17, 18세기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는 다수의 정치, 종교 엘리트를 배출한 소위 명문학교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많은 신학자가 이 학교 출신이었다. 한 예로,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던 표트르 대제는 1700년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의 교수 스테판 야보르스키를 총대주교 서리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후 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한 스테판 야보르스키 대신, 역시 같은 학교 교수 출신인 페오판 프로코비치가 표트르 대제를 도와 신성종무원 설립에 앞장섰다.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개혁에 방해가 되는 보수적 성향의 모스크바 출신 성직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키예프의 신학자를 기용한 것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 시기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 출신의 신학자들은 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 전경. ©Lee Myeong Jae


이후 1817년 알렉산드르 1세는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를 돌연 폐쇄한다. 루터파와 가톨릭파가 주류였던 당시 학문 풍토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1812년 나폴레옹과의 조국 전쟁 이후 싹트기 시작한 전제정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동(反動)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2년 뒤, 순수한 신학교로 다시 문을 열고 성직자 자녀에게만 입학을 허용한 것을 보면, 무언가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지 싶다. 10월 혁명 이후 다른 종교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도 운영이 중단되었고, 1960년대 말부터는 군사학교 기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듬해인 1992년부터 다시 입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본관 건너편에 위치한 도서관과 부속 교회 보고야블렌스키 대사원 역시 낫과 망치의 수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독립된 건물로서가 아니라, 미로처럼 복잡한 건물 안쪽 깊숙한 곳에 '설치'된 듯 자리한 이 대사원은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낡디 낡은 벽, 훼손된 벽화, 목제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성화대, 깨진 기둥. 내부는 작고 초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운 무언가가 다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부들 역시 이 공사를 성전을 개보수하는 경건한 작업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사다리를 옮기던 인부 한 명은, 


“이 교회는 가난해서 복원 작업도 더디게 진행되네요.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다 학생들 뿐이라서 그렇지요.”

몇 개월 후에 복원 공사는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보고 싶었다. 막상 아카데미 앞에 왔는데, 어느 건물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본관 길 건너편에 있는 몇몇 건물에 들어가서 물어보았지만, 대사원의 존재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번에 사진까지 찍었으니 헛것을 본 건 아닐 테고, 희미한 기억 탓에 엉뚱한 지점에서 헤매다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부속 교회라 생각했던 
그 교회가 보고야블렌스키 대사원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무언가에 홀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키예프-모길라 아카데미 부속 교회, 보고야블렌스키 대사원. ©Lee Myeong Jae


포돌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다양한 동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포돌의 급수시설 보수공사 때 설치된 삼손 분수다. 솔직히 말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의 화려한 삼손 분수와는 완전히 다른, 분수라고 하기에도 다소 민망한 조형물이다. 가운데는 사자 입을 찢는 삼손의 목상(木像)이 서있고, 사자의 벌린 입에서 물이 쫄쫄 흘러나오는 정도다. 당시 작가가 의도한 바가 분명 있겠지만, 긴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삼손도 전혀 삼손스럽지 않고, 사자도 사자 같지 않은, 보자마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분수다. 


원래 그 자리에는 천사 동상이 서 있었는데, 1809년에 삼손 목상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을 격파한 폴타바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한다. 스웨덴에 승리한 날이 바로 성 삼손의 날이었고, 당시 스웨덴 군인들은 사자 문양이 새겨진 군복을 입었다고 하니, '사자 입을 찢는 삼손'은 지극히 시의적절한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잠시 삼천포로 빠지면, 폴타바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수장인 이반 마제파는 스웨덴 편에 섰다. 아마도 스웨덴의 칼 12세가 우크라이나의 독립, 최소한 자치권이라도 보장해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러시아 제국 차르에 대항한 이반 마제파의 공적은 재조명되었고, 지금 그는 우크라이나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10 그리브나 신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종교적 모티브를 갖고 있는 삼손 분수 역시 볼셰비키의 망치를 피할 수 없었다. 1934년, 분수대의 기둥과 지붕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이전,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삼손 목상과 분수대 구조물 지붕의 안드레이 사도 동상은 창고로 옮겨졌고, 덕분에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소련 당국이 키예프 관광지 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삼손과 사자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물론 포돌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모조품이고, 원본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나름 꽤나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가진 분수다.   


키예프 도심의 미하일 광장과 저지대의 포돌을 연결하는 키예프 푼니클료르(좌), 사자의 입을 찢는 삼손 목상(우) ©Lee Myeong Jae


포돌을 빠져나와 드녜프르 강변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키예프 도심으로 올라갈 때는 푼니클료르 Cable Railway를 탔다. 러시아 제국 시절인 1905년에 설치된 이 케이블 차는 당시 성 미하일 리프트라고 불렀다. 위쪽에 있는 출입구가 성 미하일 수도원 광장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지 싶다. 하지만, 1936년 성 미하일 수도원이 파괴되면서 키예프 푼니클료르로 명칭이 바뀐다. 파괴와 복원, 변경과 재변경. 구소련을 이해하는데 빠질 수 없는 키워드인 듯 싶다. 이름이야 어떻든. 36도 경사에 총길이 238이터, 성 미하일 광장까지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 3분. 유유히 흐르는 드녜프르 강과 강 건너 오밀조밀한 신시가지를 감상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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