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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Mar 20. 2018

세례 요한 탄생일

010.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3.7.7. 키예프

세례 요한 탄생일 아침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을 찾은 사람들 ©Lee Myeong Jae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누가복음 1장 57절~64절, 개역개정성경)


그리고 다음날, 세례 요한 탄생일 아침 


전날 밤 흥겨움의 여운이 미처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이반 쿠팔라 축제의 시공간 속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이반, 즉 요한을 찾아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 정교회 달력에 기념일을 두 개나 갖고 있는 성인은 세례 요한 말고는 아마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7월 7일 그의 탄생일과 9월 11일 사망일(예언자 세례 요한 참수일) 모두를 기념하고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그리스도의 언급처럼, 기독교 맥락에서 세례 요한은 그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예배가 진행 중인 대수도원 경내의 한 교회 앞마당은 어젯밤의 북새통과는 완전히 대비가 되었다. 아침 일찍, 7시부터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침의 고요함과 예배의 경건함이 시너지를 내는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기도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단해 보였다. 아마도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겠지, 그러니 이렇게 신 앞에 나왔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들은 걸음을 멈추고 기꺼이 방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해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좁은 교회 입구에서는 성호를 긋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밖으로 나오면서 뒤돌아 성호를 긋는 사람들의 흐름이 아주 질서 정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신호등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댄 채 한참 동안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든 사이 그의 얼굴에서 보았던 그 절절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사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교회 문 밖에서 조용히 서서 기도하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신과 조우하고 위로를 얻는다 ©Lee Myeong Jae


문득, 이곳 예배당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어제 쿠팔라 축제의 시공간을 술에 취해 밤새 헤매다 온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이들이고 그들은 그들일까, 아니면 그들이 이들이고 이들이 그들일까. 이들과 그들은 정말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무튼. 요란한 축제와 경건한 예배 모두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혼란과 불안,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아닐까 싶다. 잠시 벤치에 앉아 황금 쿠폴(양퍄 모양의 교회 지붕)을 바라보는데, 하나만 떼어서 집에 가져가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들판과 수도원에서 종횡무진 보내고 나니, 우크라이나 문화라는 바다에 한 발짝 더 깊숙이 들어간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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