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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Mar 22. 2018

세례 요한 사망일, 둥그런 모양의 음식은 먹지 않아요!

011.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3.9.11. 키예프


©Lee Myeong Jae


동슬라브인들은 세례 요한이 사망한 날을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날로 여겼다. 우리 절기로 치면 입추 정도라 할 수 있겠다. 구소련이 무너진 이후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날 세례 요한처럼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예배를 드린다. 1932~1933년 스탈린 정권의 인위적, 그리고 의도적인 대기근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주로 추모의 대상이 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희생자들이 언급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예언자 세례 요한은 당시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부인으로 맞은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 지적했고, 그 때문에 옥에 갇히게 된다.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은 춤으로 헤롯의 혼을 쏙 빼놓았고, 헤롯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를 했다. 엄마의 지령을 받은 소녀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얹어 달라고 한다. 헤롯은 근심을 하지만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소녀에게 내어준다. 위대한 예언자는 그렇게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후대에 동방정교회에서는 세례 요한의 억울한 죽음을 그와 비슷하게,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과 연계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과거 동슬라브인들은 세례 요한 참수일에는 칼과 도끼를 손에 잡는 것을 죄악시했고, 머리 모양과 비슷한 양배추, 감자, 사과 같은 둥그런 모양의 음식을 먹는 것 또한 불경한 것으로 여겼다. 빵도 칼로 잘라서 먹지 않고 손으로 뜯어먹었고,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음식도 피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을 머리가 아픈 모든 병의 치료자로 여겼다고 하는데, 사실 이 대목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소 난감했다. 동슬라브 민족의 유머감각이라고 해야 할지, 종교적 감성이라고 해야 할지.


©Lee Myeong Jae


9월 11일, 피로고보 박물관의 미하일 교회에서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다. 교회 안뜰에는 교복과 트레이닝복 차림에 책가방을 멘 학생들 스무 명 정도가 서성이고 있었다. 한 학급 학생들인 것 같았다. 예배가 끝나는가 싶더니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모여 섰다. 곧이어 세례 요한의 성상화가 등장했고 십자가 행진이 시작되었다. 성상화를 든 할머니를 선두로 해서 바로 뒤에는 십자가와 향로를 손에 든 사제가 있었고, 그 뒤로 사람들이 줄지어 따라가기 시작했다. 중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움직이니 좀 낫다는 표정들이었다. 한참을 걸었다. 오솔길과 들판을 걸으며 자연 속에서 듣는 성가곡들이 정말 아름다웠다. 행렬은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 아래 멈춰 섰다. 십자가 앞에는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는 몇 종류의 빵들이 바구니와 쟁반에 놓여 있었다. 배고픔으로 죽은 이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도 간단한 예배 의식이 진행되었다. 빵에 꽂힌 초에 불을 붙이고, 사제는 십자가 주변을 돌며 향로를 흔들고 기도문을 읽었다.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빵을 나누어 먹었다. 이제야 학생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Lee Myeong Jae


빵을 나누고 있는 중에 세례 요한 성상화를 들고 있던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여있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도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늘색 머릿수건을 한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의 코 끝에서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백만 명이 희생된 대기근 속에서 가족, 친척, 친구 등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은 우크라이나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모들로부터 물려받는 당시의 처절함과 분노,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상실감과 미안함이 예배를 드리면서 새어 나온 것이 아닐까. 우크라이나 전통악기인 반두라에 맞춰 부르는 할아버지의 노랫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렸다. 


©Lee Myeong Jae


1932~1933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에 대한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만화작가인 이고리 투베리의 그래픽 노블 <우크라이나 이야기>에 잘 나와있다.  

약 4천2백만 명 우크라이나 국민 중 80%가 농부이거나 작은 땅의 주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집단화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는데, 이런 사람들 모두가 쿨라크라고 불렸다. 쿨라크는 원래 ‘지주’를 뜻하지만, 암소 두 마리만 있어도 누구든 쿨라크로 간주되었다. 레닌이 죽은 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거대하지만 낙후된 제국을 물려받았다. 스탈린이 1929년에 야심 차게 시작한 첫 번째 5개년 계획은 산업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은 서방의 기계와 노하우가 필요했다. 이것들을 마련하려고 계획한 것이 바로 우크라이나의 밀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크게 동요했다. 오랫동안 자신이 일군 땅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과 평범한 땅 주인들은 집단화와 개인 소유권 포기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지식인, 작가들과 힘을 합쳐 그들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한 농민들은 소비에트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거부했다.  

   이고리 투베리 <우크라이나 이야기> (투비북스, pp.36~39) 


이와 같은 이유로 1931년 우크라이나의 쿨라크 가족들이 해외로 강제추방되거나 숙청을 당했고, 소련 정부는 1932~1933년 사이 비밀경찰을 동원해 물자, 특히 곡물과 가축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식용, 종자용 곡물을 가리지 않고 가져갔고, 농민들은 농사일 할 가축을 빼앗기고 마느니 차라리 죽여서 배를 채웠다. 당시 쿨라크뿐 아니라 보통 농민들, 가난한 농민들까지도 피해를 입었다. 결국 종자와 일할 가축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사람들은 야생 토끼와 고슴도치를 잡아먹기 시작했고, 죽어 썩고 있는 가축의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인육까지 먹게 되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통계 또한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250만에서 4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대기근으로 희생되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희생자 수를 1,000만 명 이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키예프에서 만난 어떤 우크라이나 사람은 1930년대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의 25%가 죽고, 살아남은 사람 중에 절반 정도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실제로 지금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은 진짜 우크라이나인이 아닐 수 있다는 웃픈 농담을 했을 정도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군에 협조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아마도 대기근을 겪으면서 소련 정부에 반감과 분노를 갖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 아닐까 싶다. 가슴 아프게도,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정교회 축일을 통해서까지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우크라이나 역사와 우크라이나 민중의 삶이 고달팠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세례 요한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수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도 모두 저 세상에서의 삶은 좀 더 대접받고 존중받는, 좀 더 따뜻하고 넉넉한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Lee Myeong 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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