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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Apr 08. 2018

동슬라브인의 새해맞이- 샴페인, 불꽃놀이, 풍성한 식탁

012.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4.1.1. 키예프

2004년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키예프 독립광장에 운집한 인파, 그리고 특별무대 ©Lee Myeong Jae


2004년은 나름 일탈(逸脫)로 한 해를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소란스럽게 새해를 맞이했다. 2000년 영하 40도 혹한의 야쿠츠크 거리에서 러시아 친구들과 새해를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든 대체로 자고 있는 중에 새해와 만나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수많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한 키예프에서의 새해맞이는 유쾌했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2003년 12월 31일,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이동통로를 확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배낭과 카메라 가방, 비디오와 SLR 카메라를 온몸에 두르고 있던 나는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키예프의 중심인 독립광장과 흐리샤티크 거리로 나와서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매년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 주변은 여전히 발 디딜 틈 없는 북새통의 시공간이었다. 상을 펼 자리만 있으면 신문지든, 스카프든, 비닐봉지든, 테이블보든 무엇이든 깔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이곳저곳에서 외국인이라며 이리 와서 한 잔 하라고 초대하고 접대받는 보드카 몇 잔에 덩달아 나도 우크라이나의 한 구성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루 걸러 한 번씩은 경험하던 인종차별에 대한 불쾌감도 이 날만큼은 느끼지 못했다. 긴 연휴나 명절 전후 이곳 사람들은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    


독립광장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Lee Myeong Jae


2002년 12월 31일 자정 무렵 잠시 이 곳을 지나쳤을 때는 연신 터지는 샴페인 뚜껑을 이리저리 피하며 다녔지만, 올해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새해 아침 흐리샤티크 거리에 버려진 샴페인 병을 치우는데만 십 여대의 트럭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번엔 두어 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다소 크게 감지되는 변화 중 하나는 축배용 샴페인이 세대교체 중이라는 것이다. 가장 애용되는 샴페인은 여전히 <소비에트> 샴페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키예프>,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 고유 상표의 샴페인이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가 구소련과 러시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려는 열망이 샴페인 선택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구소련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세대가 점차 사라지고 우크라이나 고유의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세대로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닐까 싶다.   


독립광장에서의 불꽃놀이. 뒤쪽으로는 우크라이나 호텔이 보인다 ©Lee Myeong Jae


©Lee Myeong Jae

2004년 새해를 알리는 축포가 터지면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흐리샤티크 거리에 뿌연 연기가 걷히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표트르 대제가 1701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면서 붉은 광장에서 ‘로켓’을 쏘아 올렸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새해 불꽃놀이는 동슬라브인의 오랜 전통이다. 끊임없는 외세의 공격과 지배, 전제정치, 구소련의 공포정치를 경험하면서 억압된 정서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을지 모르는 동슬라브인들에게 하늘 높은 곳에서 시원스러운 소리와 함께 아름답게 터지는 불꽃은 어쩌면 자유와 해방이라는 카타르시스적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표트르 대제는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불꽃놀이와 함께 욜카라고 부르는 트리도 유럽에서 들여왔다. 그래서 동슬라브인들의 트리는 성탄절이 아니라 새해를 기념하는 트리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진짜 나무를 집에 세우고 장식하기 때문에 연말이 되면 키예프 이곳저곳에서 아담한 사이즈의 전나무를 파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참고로, 욜카의 가격은 12월 31일 저녁 무렵 무터 자정 전 30분 정도까지 가장 저렴해진다고 한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세계의 모든 문명국가들과 조화 속에 살아야 한다’면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따르던 그레고리우스력을 도입했다. 1918년 1월 31일은 정교회력, 즉 율리우스력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다음 날은 바로 2월 14일이 되었다. 소련 당국의 달력 개혁은 강제적이었을 뿐 아니라, 과거, 특히 종교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었다. 1908년 런던올림픽 때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던 제정 러시아의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이 12일이나 늦게 도착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서구 유럽과 다른 달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인한 불편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력의 도입으로 인해 수 세기 동안 정교도로 정의되던 동슬라브인들의 일상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듬해부터는 새 달력의 1월 1일이 소비에트 시민의 새해가 되었고, 동슬라브인의 원래 새해는 1월 14일이 되었다. 성탄절 또한 1월 7일로 옮겨지는 바람에 성탄절을 축하하기도 전에 새해를 맞아야 했고, 새 달력으로 1월 6일인 성탄절 전야의 첫 별이 뜰 때까지 40일 간 금식을 하던 이들에게 1월 1일의 새해 축하와 풍성한 음식, 폭음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정교회 달력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던 동슬라브인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양식을 바꿀 수도, 정교도라고 스스로를 드러낼 수도 없는 복잡한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비에트 통치 70여 년이 흘렀다.


새해를 축하하는 가족 뒤로 우크라이나 깃발과 "소중한 키예프 시민여러분, 새해와 성탄절을 축하합니다"라고 적힌 쿠츠마 대통령의 축하인사 간판이 보인다 ©Lee Myeong Jae


물론, 소련 사람들도 새해를 가족 축일로 여기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새해는 집에서 풍성하고 차분하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었다.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따라 그 해를 보내게 될 것이다.”라고 여전히 생각했다. 새해 전야 만찬에 허둥지둥 늦게 도착하면 한 해 동안 내내 방황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풍성하고 배부른 식탁과 평화로운 분위기 가운데 새해를 맞이하려고 했다. 빈 접시와 빈 잔으로 새해를 보내는 것은 더더욱 허락되지 않았고, 식탁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가능한 많이 접시에 담았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지난해와 작별하는 말을 나누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새해맞이 의식이다.  


소련 붕괴 후 동슬라브인들의 새해맞이는 또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람들이 거리와 광장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키예프에서도 자정 무렵 사람들은 샴페인과 보드카, 갖가지 음식을 싸들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나왔고, 광장 한가운데 설치된 거대한 스피커에서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대형 스크린에 대통령이 등장해서 축배를 들자 엄청난 양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매캐한 연기 속에 묻힌 독립광장은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독립광장과 흐리샤티크 거리는 춤과 난장이 가득한 거대한 공연장으로 변했다.   


과거의 전통을 되살려 가면을 쓰고 새해 맞이를 하러 나온 사람들, 그리고 키스하는 연인들 ©Lee Myeong Jae
 새해맞이 행사 후 흐리샤티크 거리를 청소하는 아주머니들과 샴페인 병 들 버려진 쓰레기들 ©Lee Myeong Jae


1917년 혁명 이후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지만, 새해 가장행렬은 동슬라브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였다. 사람들은 갖가지 익살스러운 가면과 옷차림을 하고 동네를 밤새 떠들썩하게 돌아다녔다. 해가 뜨면 잠자리에 들고, 저녁이 되면 다시 밖으로 나와 불타는 밤을 보냈다. 흐리샤티크 거리에도 가면을 쓰고, 유치하다 싶은 소품들을 몸에 걸치고 새해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문화와 전통의 변형이라고 할까, 수 십 년 전의 무언가가 어떤 형태로든 남아서 재현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뜨거운 키스로 새해를 축하하는 연인들, 연말연시를 계기로 사랑을 고백하는 이들, 먼 곳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이들, 친구들과 거나하게 보드카 잔을 기울이는 이들. 지난 한 해의 괴로움과 아쉬움을 다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좋은 한 해를 보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다 동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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