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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Jan 27. 2018

동유럽 끝 중의 끝, 우크라이나에 서다

001.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해가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 유명한 도시를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돌아다녔다.
많은 공원들, 유쾌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얼굴들, 현란한 색깔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미소 짓는 얼굴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러시아 기행>(열린책들, p.37)  


우크라이나 드녜프르 강변에 자리한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 ©Lee Myeong Jae




웬만한 여행 마니아라 하더라도, 그들의 동유럽 여행 발걸음은 대부분 폴란드 또는 헝가리에서 끝난다. 한걸음 동쪽으로, 국경을 하나 더 넘어 우크라이나라는, 그리고 러시아의 어머니 도시인 수도 키예프라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행운을 갖는 사람은 흔치 않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 말처럼 정말 신의 섭리가 작용해야 밟을 수 있는 그런 땅인지도 모른다. 향긋한 천년의 역사와 문화가 곳곳에 배어 있는 그 끝을 거닐어보자.



어디선가는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우크라이나 :

흑토지대, 도네츠크 탄전, 체르노빌, 크림전쟁, 얄타회담, 오렌지 혁명, 흑해함대


혹시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루마니아를 여행하고 있다면, 국경을 하나만 더 넘으면 된다. 90일 이내로는 비자도 필요 없어진 지 오래다. 러시아, 벨로루시, 몰도바에서도 기차 한 번이면 된다. 터키에서는 배를 타고 하룻밤이면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 땅을 밟을 수 있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나라는 우크라이나다. 설마 하고 의심을 품겠지만, 사실이다. 게다가 18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리학자들이 측정한 ‘유럽의 지리적 중심’ 지점이 우크라이나에 있다. 러시아와 서구 유럽,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한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예나 지금이나 늘 ‘센’ 나라들의 간섭과 억압을 받으며 살아왔다. 러시아와 구소련이라는 대국의 그늘에 가려서 그 진면목 또한 항상 평가절하 되었다. 


사실,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라는 이름표를 달고 존재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번성한 키예프 루시(러시아의 옛 이름)는 10~12세기 동슬라브(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여러 공국의 종주국이었지만, 1240년 몽고 타타르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 이후 동슬라브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이동했고, 우크라이나 땅 이곳저곳은 어떤 때는 리투아니아로, 폴란드로 불렸고, 러시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 국가가 되면서부터 비로소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국경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편입된 서부지역과 1954년 흐루쇼프 서기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크림반도가 합쳐져 뒤늦게 완성되었다. 물론, 크림반도는 2014년 3월 주민투표로 러시아에 다시 귀속되었다. 이런 복잡다단한 역사 때문에 우크라이나인 스스로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심장 키예프는 항상 키예프였고, 이곳에는 항상 우크라이나인이 살아왔다.


키예프의 첫 여행자, 사도 안드레이


2000년 전,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여행을 하던 그리스도의 제자 안드레이는 드녜프르 강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 언덕 위에 신의 은총이 내릴 것이며, 큰 도시가 생겨나서 이곳에 많은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라고 축복했다. 그의 예언대로 키예프가 등장했고, 988년 비잔틴 정교회를 받아들인 후 키예프는 더욱 번성했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시절인 1767년, 안드레이 사도가 섰던 바로 그 언덕에 안드레이 교회가 건축되었다. 


우크라이나 바로크 건축의 백미인 이 교회를 아침저녁으로 감상하기 위해 20세기 한 권력자의 아내는 근처 빌라 건물 측벽을 뚫어 창문을 박았을 정도로 안드레이 교회는 아름답다. 그 속살 또한 큰 매력을 품고 있다. 황금빛과 진홍빛이 어우러진 우아한 내부 장식과 안트로포프의 성상화들에 둘러싸인 채 작은 연주회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소리로 충만하다, 황홀하다’, ‘소리가 나를 온전히 감싼다’는 표현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교회에는 특이하게도 종탑이 없는데, 안드레이 교회의 종이 처음으로 울리는 날, 그 언덕 밑에 매워진 바닷물이 솟아나서 키예프가 물에 잠길 것이라는 전설 때문이란다. 


이곳에서부터 ‘우크라이나의 몽마르트르’라고 하는 안드레옙스키 스푸스크, 직역하면 ‘안드레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예술과 문화의 거리인 이곳에는 우크라이나 전통의상과 기념품, 각종 물건들이 넘쳐나고, 길을 따라 옹기종기 자리 잡은 다양한 갤러리에서는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로 유명한 극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생가가 있고, 작지만 강한 원 스트리트(One Street) 박물관에서는 이 길의 역사, 문화,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6,500여 점의 기록물 및 전시물을 볼 수 있다. 특히 5월 마지막 주 토, 일요일의 키예프 날과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8.24)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온갖 부류의 예술가들, 그리고 각종 수공예품 등과 만날 수 있다. 


이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포돌의 입구가 있다. 포돌은 과거 키예프의 무역과 상업, 산업이 태동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왠지 분주하고 북적거리는 느낌이다. 1892년 제정 러시아 내에서 최초로 트람바이(Tram, 전차)가 운행된 포돌에서는 육중한 소비에트의 트람바이들이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작정 아무 트람바이에 올라타서 느릿느릿, 덜컹거리는 키예프를 반 바퀴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운이 좋아 드녜프르 강을 횡단하는 트람바이면 금상첨화. 그리고 안드레이 교회가 있는 언덕 위로 되돌아올 때는, 키예프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통과의례와도 같은 푼니쿨요르(Cable Railway, 케이블카와 비슷)를 타고 시퍼런 드녜프르 강과 포돌, 저 멀리 신시가지를 감상하며 올라가면 된다.


천년의 향기,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 


키예프 보리스폴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춘 비행기 안에서 ‘우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름답게 펼쳐진 눈부신 황금 쿠폴(양파 모양의 교회 지붕)과 초록색 돔. 다소간의 과장이 허락된다면, 마치 천상의 세계를 지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바로 1051년, 드녜프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베례스토보 언덕의 작은 동굴에서 시작된 수도생활이 천 년이나 지속되고 있는 동방정교회의 성지,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이다.  


국경을 넘어 수도원 경내에 발을 딛는 사람은 두 부류. 여행자, 그리고 순례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곳 수도원 지구는 키예프에 온 여행자들의 눈과 귀를 가장 사로잡는 곳이다. 수도원을 반나절 이상 거닐어 보지 않고는 키예프에 다녀왔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루지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의 일부 정교도에게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은 평생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할 순례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수도원 안뜰은 과거와 현재, 순례자와 여행자, 정교도와 이교도,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약간의 긴장 속에서 나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시공간이 된다. 


화창한 날 낮에, 북적대는 인파 속에서 여행자의 자유를 누리는 것도 좋겠지만, 비 오는 날 낮게 깔린 안갯속 수도원을 거닐거나, 이른 아침 혹은 늦은 저녁의 한산한 수도원을 거니는 그 자체만으로도 열 편의 아름다운 시를 감상하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96.5m나 되는 대종탑의 비좁은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보면, 치열한 삶에 대한 고민도 잠시 잊게 된다. 바보 성자, 유로지브이가 된 듯한 느낌도 든다. 종탑 꼭대기에 올라 검푸른 드녜프르 강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삶의 고단함이 강물을 타고 흘러가버릴 것 같고, 눈물을 뿜어낼 만큼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맑게 씻어질 것만 같다.  


순례자뿐 아니라 여행자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동굴 투어다. 개방된 코스는 길이 383m. 지하 10~15m에 있는 폭 1m, 높이 2m 정도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세의 수도사가 된 것 같다. 그 길옆으로는 수도사들이 들어가 평생을 살았던 작은 굴들과 지하 예배당이 있다. 유리관 속에 누인 수백 년 된 수도사들의 미라와 유골도 볼 수 있다. 날씬한 초 하나만 손에 들고 수도사를 뒤따라가는 동안, 천 년 전 수도사들이 그 속에서 뱉어낸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삶과 죽음 중간지대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경험이기도 했지만, 신과 진지하게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이곳을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도심 한복판의 성소, 블라디미르 대사원


찍고 싶은 사진도 마음대로 못 찍고, 뭘 하면서도 계속 조심스럽고,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 내부를 편안한 마음으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곳곳에서 마주치는 사제들과 수도사들의 눈치도 보이고...... 수도원에서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면, 도심 한복판의 성소, 블라디미르 대사원으로 가보자. 물론 이곳에서도 긴장을 무장해제할 수는 없지만, 비용, 일종의 헌금을 지불하면 예배 진행 여부과 상관없이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성가대 석이 있는 위층까지 올라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다. 


988년, 동슬라브인의 삶과 영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기독교를 최초로 수용한 키예프의 대공이 바로 블라디미르다. 그 공로로 그는 성자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블라디미르 대사원은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 수용 9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계획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대공이 세례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성화가 내부에 크게 그려져 있다. 10월 혁명의 주인공 레닌의 이름도,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의 이름도 블라디미르인 것을 보면, ‘세계를 다스리다’라는 뜻을 가진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에는 어떤 강력한 지도자적 힘이 숨어있나 보다. 아무튼,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1882년 완공된 이 사원은 1896년에 가서야 내부 단장을 마무리하고 봉헌식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도 참석했다고 한다. 


정교회 신자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교회를 찾는다. 누구는 출근길에, 누구는 퇴근길에, 혹은 그냥 지나치다가, 마음 가는 대로, 또 발걸음 닿는 대로 교회 문을 두드린다. 촛대 혹은 성상화 앞에 서서 촛불을 밝히고 그 향과 연기가 자신의 기도를 싣고 하늘에 닿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온갖 탐욕 속에 절어 살다가 일요일에 한 번 잠시 교회 의자에 앉아 마치 소변보듯 회개와 감사를 쏟아내고 돌아서는 우리네 신앙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처럼 그냥 조용한 성전의 한 복판에 서보자. 찬찬히 눈을 감고 있으면, ‘사는 게 만만치 않지?’하는 위로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고, 내가 얼마나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인지, 그리고 신이 그동안 나를 얼마나 참아주고 기다려주었는지가 단숨에 느껴진다. 


정교회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이러다 정교도로 개종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살짝 드는 순간, 대사원을 나와 근처 솁첸코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뭔지 모를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리웠던 속세의 공기를 양껏 들이마신다. 공원 이름의 주인공인 타라스 솁첸코(1814-1861)는 19세기 우크라이나의 지식인, 시인, 화가, 혁명가, 사상가였다. 농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그림 그리는 재능을 알아본 주인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유민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비밀결사조직인 키릴과 메소디우스 형제단 활동으로 유배와 망명 생활을 반복했다. 러시아 미술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그림 <They did not expect him>을 보면, 그림 속 벽면에 솁첸코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아마도 이러한 활동가적 이미지 덕분인 듯싶다. 이 공원은 그의 이름이 붙은 솁첸코 키예프국립대학교와 마주하고 있어서 우크라이나의 젊은 지성들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벤치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가벼운 미소와 인사, 그리고 맥주 한 병만 권하면 토론이든 수다든, 말이 통하든 안 통하든 상관없이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끝나지 않은 천년의 사랑, 소피야와 미하일


소피야 대사원과 미하일 대사원은 천년의 세월 동안 그냥 그 자리에서 서로 마주 보고만 있다. 동슬라브어에서 여성명사는 모음으로 남성 명사는 자음으로 끝나는데, 따라서 소피야는 여성, 미하일은 남성이다. 실제로 소피야 성당은 여성스럽고, 미하일 성당은 왠지 남자 냄새가 난다. 두 대사원의 중간 지점에 있는 보그단 흐멜니츠키 동상 앞에 서서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면,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을 하고 있는 연인이 연상된다.  


소피야와 미하일, 두 대사원 모두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인 11세기 전반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외형을 갖고 있었다. 두 건축물 모두 13세기 중반 몽고 타타르의 침입으로 크게 훼손되었고, 18세기에 재건축과 증축의 과정을 거쳐 복원되었다. 혁명 이후 소피야 대사원은 박물관으로 용도 변경되면서 살아남았지만, 다이너마이트가 투입된 미하일 대사원은 ‘영구적 불능화’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슬픈 사랑처럼 느껴졌던 것은 바로 이 장면, 소멸하는 미하일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소피야가 연상되어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소련 붕괴 후 소피야 대사원은 여전히 박물관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미하일 대사원은 1999년, 18세기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어 예배와 수도원 기능이 회복되었고, 키예프 영성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 ‘살기 위해 죽는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까. 


소피야 대사원에서는 11세기 건축 당시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감상할 수 있다. 사실 소련의 등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소피아 대사원에서 18세기의 프레스코화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표현대로 볼셰비키는 '원래의 성상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쌓인 그을음과 연기, 덧칠을 섬세하게 벗겨내는 작업을 했다. 오래된 수도원과 궁전도 마찬가지였다. 소피야 대사원의 야로슬라프 대공 가족의 프레스코화 역시 그렇게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천 년 전의 붓 자국, 색채, 실루엣과 만난 것만으로도 무모하게 국경을 넘은 보상이 충분히 될 것 같다.


대천사 미하일은 키예프의 공식 수호천사다. 그래서 키예블랴닌, 키예프 인들에게 미하일 대사원은 더욱 특별하다. 미하일 대사원의 외벽은 빛의 강약과 방향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하늘색이다. 그 벽면을 한 평 정도만 몰래 벗겨 집에 가져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곱다. 미하일 대사원 앞에는 항상 ‘황금 돔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당시 키예프 루시 최초의 황금 도금 쿠폴(양파 모양의 교회 지붕)을 가진 교회여서 그렇다고 한다. 역시 탐나는 아이템이다. 미하일 대사원까지 와서 종루에 올라가 보지 않을 수 없다. 미하일의 날(11.21), 종탑에서 내려다보는 축성 의식과 십자가 행진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종탑에는 크고 작은 50여 개의 종이 달려있는데, 매일 오전 7시 40분, 오후 4시 40분의 예배 전 5분 동안, 잘생긴 청년 사제들의 캐릴론(Karylon, keys-bell instrument, 전자오르간과 비슷한 형태) 연주, 종소리의 향연을 눈과 귀로 감상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살아있는 전통, 일탈과 유희의 공간 피로고보 야외 박물관


공식 명칭은 ‘우크라이나 국립 민속 건축&생활사 박물관’. 하지만, 키예프 시내에서 이 박물관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아마 열의 아홉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냥 피로고보 박물관이라고 하면 된다. 키예프 남쪽 끝의 피로고보 마을에 널찍하게 자리를 잡은 탓에 모두 그렇게 부른다. 홈페이지 대문에서 조차 눈곱만 한 크기로 쓰인 공식 명칭을 찾아내는데 시간이 한참 걸릴 정도다. 

유럽 최대 규모의 야외 박물관인 이곳은 1969년 개장했다. 16~20세기에 지어진 300여 개 건축물들이 박물관 이곳저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농가, 교회, 대장간, 헛간 등 실제로 있던 건물들을 우크라이나 이곳저곳에서 통째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건물 하나하나를 찬찬히 둘러보며 과거의 생활상을 짐작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사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어마어마하게 넓은 박물관 경내를 걸어다는 것은 고행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다녀온 사람들 중에 비추 글을 남기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피로고보 박물관의 핵심 콘텐츠인 각종 축제와 축일을 경험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박물관에서는 연 30회 정도의 특별행사가 열리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여느 박물관과는 다른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기억한다. 물론, '재현'을 기본으로 하지만,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고리타분한 재현이 아니라, 결국에는 모든 이들이 참여하고 즐기는 실제 축제의 장이 마련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서구의 사육제에 해당하는 마슬레니차에는 함께 모여 건초 인형인 추첼로를 불에 태우고, 원무를 추고, 집에서 싸온 블린(일종의 얇은 핫케이크)과 보드카 등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봄을 맞이한다. 대표적인 전통 축일인 이반 쿠팔라에는 다 같이  물장난을 하고, 모닥불을 뛰어넘고, 불타는 수레바퀴를 굴리고, 밤늦게까지 난장을 벌이며 여름을 떠나보낸다. 박물관은 순식간에 일탈과 유희의 시공간으로 변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가는 재생의 시공간이 된다. 


종교 축일도 다르지 않다. 박물관 내에 전시되어 있는 17세기 목조건축물인 미하일 교회는 실제 피로고보 마을 주민들의 예배 장소다. 1990년부터 다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구소련 시절 중단된 교회의 기능을 회복한 미하일 교회에서는 매주, 그리고 정교회 축일마다 예배가 있고, 세례식과 결혼식도 열리는 여느 마을의 교회와 다름없다. 이제는 워낙 익숙해져서인지 사제들도 사람들도 여행자들에게 관대하다. 여행자들도 예배나 십자가 행진에 참여할 수 있고, 특정한 날 특별히 마련된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다. 특히 부활절(정교회 부활절은 개신교, 가톨릭의 부활절보다 2~4주 정도 늦다) 이른 새벽에 초를 꽂은 부활절 바구니를 든 수 백명의 키예프 시민들이 사제의 축성을 받기 위해 겹겹이 교회를 둘러싼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을 이룬다. 


After Kiev


그리고는...... 잘 모르겠다. 

우크라이나가 마음에 들었다 싶으면, 밤 기차를 타고 예술과 문화의 도시 오데사로 가서 에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의 현장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이제는 러시아 땅이 되어 키예프에서 기차를 타고 바로 가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크림반도의 얄타에 가서 <얄타회담>이 열린 리바디야 궁전을 방문하거나, 세바스토폴에 가서 크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사키 리조트에서 진흙 세러피를 받고 크림 산(産) 포도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거나, 크림 타타르인의 문화를 경험해 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산이 좋다면, 산간 기차를 타고 카르파티아 산맥의 아무 마을에서나 내려 산촌의 따뜻한 인정과 사람 냄새를 느껴보면 되고, 지하 300미터 속의 솔로트비노 소금광산에 가서 소금 세러피를 체험하는 것도 방법이다. 좀 더 서유럽 냄새를 맡고 싶다면 우크라이나 민족정신의 도시라 할 수 있는 르보프로 가서 구소련 당시 최고의 맥주라 인정받았던 르보프 맥주를 마시며 키예프와는 또 다른 가톨릭 우크라이나의 향취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선택은 자유.



※ <동유럽 끝 중의 끝, 우크라이나에 서다>는 2015년 8월, 모 주간 매체에 여행 관련 원고 게재 요청을 받고 작성한 글이다. 최종 원고와 사진을 보냈으나, 당시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되는 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나날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여행'이라는 테마가 적절치 못한 것 같다며 결국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반려된, 빛을 보지 못한 글이다. 그곳 형편은 여전하지만, 우크라이나에 관한 브런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들어가는 첫 글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로고보 박물관, 이반 쿠팔라 축제 ©Lee Myeong 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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