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J Lee Feb 03. 2018

모스크바 창건자 유리 돌고루키가 키예프에 왜?

002.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베레스토보의 구세주 교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의 소유 및 관리 하에 있다. ©Lee Myeong Jae



유리 돌고루키.

키예프 공국(公國)의 대공이었지만, 러시아 역사에서는 ‘모스크바의 창건자’로서 보다 주목받는 그 이름을 키예프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우연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귀국을 몇 주 앞두고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을 찾았다.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현실에 대한 상상과 걱정에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차분히 경내를 거닐고 있는데 수도원 담장 밖으로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수 차례 이곳을 드나들었지만 한 번도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베레스토보의 구세주 교회란다. 사진이라도 한두 장 담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개의 선명한 초록 지붕마다 아름다운 황금 쿠폴을 하나씩 달고 있는 아담한 교회였다. 우크라이나에서 드물지 않게 만나는 이 신비스럽고 기묘한 초록이 나는 참 좋다. 키예프의 음울한 날씨와도 잘 어울린다. 이 초록은 지상의 색이 아닌 듯한, 그리고 무언가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햇빛을 받아 은은하고 부드러운 초록을 발산할 때도 그 우아함을 드러내지만, 빛의 결핍과 어우러졌을 때의 그 초록으로부터는 오묘함과 묵직함이 전달된다. 상당히 우크라이나스럽다고 할까.    

돌아 돌아 구세주 교회 앞에 도착했다. 혹시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문고리를 당겨보았다. 닫혀 있었다. 문 오른편의 석판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딱 보니 우크라이나어라서 일단 카메라부터 갖다 댔다. 자료로 남겨놓고 해석은 나중에. 초점을 맞추려고 반셔터를 눌렀는데, 뷰파인더 속으로 ‘돌고루키’라는 단어가 크게 들어왔다. 깜짝 놀랐다. 
  

베레스토보의 구세주 교회 벽면의 석판 ©Lee Myeong Jae

1157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아들이며

모스크바의 창건자인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돌고루키

이 교회에 묻히다 



게다가 해독이 가능한 수준의 우크라이나어였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의 거리는 생각보다는 가깝지 않아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때가 종종 있다. 아무튼 무척이나 반가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가 아니라 왜 키예프에?”, 그리고 “수도원 경내도 아니고 왜 담장 밖에?”라는 두 개의 질문이 동시에 머리를 스쳤다. 

9세기 초 동슬라브인(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은 '키예프 루시'라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국가를 형성했다. 지방 공후들은 키예프 공국의 공후에게 ‘대공’의 칭호를 부여하고 그의 수위권을 인정했다. 키예프 루시는 비잔틴 제국의 황녀 안나와 결혼을 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블라디미르 1세(978-1015)를 거쳐 그의 아들 야로슬라프 무드리 시절(1019-1054) 전성기를 누린다. 야로슬라프 사후,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정권을 잡고(1113-1125) 혼돈의 키예프 루시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죽음과 동시에 키예프 루시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고 만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둘째 아들이 바로 유리 돌고루키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모노마흐의 외증손자 이기도 한 그는 키예프 루시 북동부의 수즈달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1147년 이 지역의 작은 마을 쿠츠코보를 자신의 영지에 편입시킨 뒤 모스크바로 이름을 바꾸고, 1156년부터 크렘린, 즉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권력의 핵심이 되는 모스크바는 이렇게 출발했고, 유리 돌고루키는 모스크바의 창건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긴 팔’이라는 뜻의 별명 돌고루키가 말해 주듯이, 그는 자신의 영토를 계속해서 넓혀 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키예프 공국의 권좌를 갈망했다. 그래서 두 차례나 키예프 공격을 감행한다. 그는 1149년 이쟈슬라프를 몰아내고 키예프를 손에 넣었지만, 1151년 쫓겨난다. 1155년 다시 키예프 대공의 지위에 오르지만, 2년 후 사망한다. 그리고 바로 이 구세주 교회에 묻혔다. 

당시 베레스토보는 키예프 대공의 별궁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구세주 교회는 그 규모가 상당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니 쇠락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구세주 교회가 여전히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의 관리 하에 있기는 하지만, 키예프를 무력으로 침공했던 그를 수도원 담장 너머에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개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베레스토보의 구세주 교회 ©Lee Myeong Jae

   

유리 돌고루키는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자신의 묘비명에 키예프 대공의 타이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드녜프르 강을 통한 발트해-키예프-그리스 무역로의 쇠퇴, 몽고 타타르의 침입으로 키예프 공국은 무너졌다. 루시의 주도권은 모스크바로 넘어갔고 키예프의 위상은 회복되지 못했다. 그 이후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변방, 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공화국 중 하나 정도로만 인식되어 왔다. ‘일부’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인을 ‘소(小) 러시아인’이라 부르며 폄하했고, ‘하홀(kakhol-탕아, 호색한)’이라 부르며 비하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이러한 평가절하가 혹시 키예프에 대한 원초적인 역사적 열등감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첫 잠수함,  태평양 함대에 실전 배치된 최초의 제4세대 보레이급 핵잠수함의 이름이 바로 유리 돌고루키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넵스키 함에 이어, 2006년 건조를 시작한 동급 세 번째 핵잠수함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함이다. 이렇게 러시아의 역사, 정치, 문화, 종교의 많은 부분이 키예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수 백 페이지의 초기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이 두 나라는 사실 정서적으로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차 대전 후 병합된 서부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2000년대 초반 키예프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러시아인이세요, 우크라이나인이세요?”라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러시아에 거주하는 가족이나 친척이 없는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민족의식이 대부분 희석되고 러시아화 되긴 했지만 러시아 내에 거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도 약 1천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독립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각자의 길을 가고 있지만, 모스크바, 즉 러시아의 기초를 세운 유리 돌고루키가 잠들어있는 우크라이나 키예프가 동슬라브 민족의 어머니 도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크라이나는 충분히 매력이 있는 나라다. 러시아와 더불어 천 년의 향기로운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잠재력과 가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저평가되어있는 주식과 같다고 한다면 너무 속된 비유일까.


베레스토보의 구세주 교회. 뒤쪽으로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이 보인다. ©Lee Myeong Jae


매거진의 이전글 동유럽 끝 중의 끝, 우크라이나에 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