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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Feb 10. 2018

키예프의 첫 순례자, 사도 안드레이

003.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키예프의 성 안드레이 교회 앞쪽에서 바라본 드네프르 강변 ©Lee Myeong Jae


예루살렘을 떠난 그리스도의 제자 안드레이는 터키 북부의 흑해 연안 도시 시노프(Sinope)를 거쳐 크림반도의 고대 도시 헤르손네스(Chersonese)에 도착한다. 헤르손네스는 현재 흑해함대로 유명한 세바스토폴과 인접해 있다. 안드레이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한 후, 드네프르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며칠 뒤 안드레이 사도는 가던 길을 멈추고 드네프르 강변 어느 한 사면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그는 동행한 제자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언덕 위에 신의 은총이 내릴 것이며, 이곳에 수많은 아름다운 교회를 가진 큰 도시가 건설될 것이다.” 

설교를 마친 안드레이 사도는 언덕 위로 올라가 그곳을 축복하고 십자가를 세운다. 

수 백 년 후 그의 예언대로 드네프르 강변에 키예프가 등장했고, 988년 키예프 루시가 비잔틴 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안드레이 사도가 십자가를 세웠던 바로 그 자리에는 성 안드레이 교회가 우뚝 서게 되었다. 

기원후 12세기에 쓰인 <원초 연대기>(동슬라브인의 기원 및 852~1110년 키예프 루시의 역사를 기술한 책.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라고도 함)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 안드레이 사도가 키예프를 방문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다수의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은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고 있다. 나 역시 ‘왔었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안드레이 사도가 순교한 곳이 여기에서 그리 멀지만은 않은 그리스의 파트라이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안드레이 사도의 예언 이후, ‘반석 위에 지은’ 성 안드레이 교회가 출현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1세기 말부터 이 언덕에는 성 안드레이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외부 침략으로 세워졌다 무너졌다를 수 차례 반복했고, 18세기 무렵에는 이미 오랫동안 빈자리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1744년 키예프를 방문 중이던 제정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표트르 대제의 딸)가 9월 9일, 자기 손으로 직접 이 교회의 주춧돌 세 개를 놓았고, 여제의 명을 받아 1747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키예프 행정당국의 무관심과 자금 부족, 전폭적인 지원을 하던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망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767년 마침내 성 안드레이 교회가 완공되었다.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의 백미라고 하는 성 안드레이 교회는 F.B. 라스트 렐리(1700~1771)의 작품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스트로가노프 궁전, 보론초프 궁전, 스몰느이 수도원, 차르스코예 셀로의 예카테리나 궁전, 키예프의 마린스키 궁전 등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 카를로 라스트렐리를 따라 러시아에 왔다. 아버지 역시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조각가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하일 성(城)의 표트르 대제 기마상을 제작했다. 아들 라스트렐리는 1730년 안나 여제의 즉위와 더불어 러시아 제국의 황실 수석 건축가로 임명되었고, 그 후 엘리자베타 여제와 예카테리나 2세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의 성 안드레이 교회는 1978~79년의 공사로 복원된 것이다. 196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성 안드레이 교회 건축을 위한 과거 라스트렐리의 최초 스케치들이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일부를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건축가는 죽어서 도면을 남겨야 하나보다. 


키예프 동굴 대수도원 근처의 성 안드레이 사도의 석상(왼쪽) / 성 안드레이 교회(오른쪽) ©Lee Myeong Jae



다른 교회들과 달리 성 안드레이 교회에는 종탑이나 종루가 없다. 특이한 사례인 만큼, 이와 관련된 전설 역시 없을 수 없다.  이 지역은 원래 바다에 인접한 곳이었다고 하는데, 안드레이 사도가 언덕 위에 십자가를 세우자 바닷물이 물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키예프 대지 바로 밑에 여전히 그 바다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교회 종을 울리는 순간 바닷물이 다시 솟아 나와서 키예프를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란다. 물론, 실제로는 황실 가족만을 위한 교회였기 때문에 예배를 알리는 종이 굳이 필요 없어서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건축 당시 지성소 부분에서 샘이 나오고, 건물 기반이 지하수에 침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보면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스트렐리는 특별한 지하 구조물을 만들어 그 위에 2층짜리 기단을 놓은 후 건물을 올렸다.


일요일 오후.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로 구성된 클래식 앙상블 라비산(Ravisan)의 연주회가 있었다. 일찌감치 도착해 들어가니 5시부터 진행된 예배가 막 끝나고 공연 리허설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찬찬히 실내를 돌아보았다. 성 안드레이 교회의 속살은 여느 교회의 내부와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차원의 어떤 화려함과 웅장함이 느껴진다.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황금빛과 진홍빛에 무언가 압도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황실 교회다웠다. 7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옷이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귀가 예민해지는 공간에서 서른아홉 개의 성상화로 가득 채워져 있는 23.4m 높이의 이코노스타스(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현악기의 선율과 화음을 듣고 있으니, 말 그대로 ‘소리로 충만하다, 황홀하다’, ‘소리가 나를 온전히 감싼다’는 표현이 저절로 떠오른다.


안드레이 사도는 하늘에서 이 음악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2천 년 전 키예프 방문을 떠올리며 많이 변했네 하고 추억을 했을지도, 아니면 나는 저기 가본 적도 없는데 하며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키예프에 갔었는지 안 갔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여하튼 음악은 참 좋네 하고 유쾌해했을 수도 있겠다. 연주회가 끝나고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길, 오감이 행복했던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였겠지.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성 안드레이 교회 옆, 20세기 말 우크라이나의 권력자가 살았던 집. 교회를 그의 아내는 콘크리트 측벽을 뚫고 교회를 향한 창을 냈다고 한다 ©Lee Myeong 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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