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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Feb 11. 2018

성 안드레이 축일, 미리 만나보는 우리 남편!

004.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3.12.13. 키예프

물을 가득 담은 투명한 주전자를 탁자 위에 놓고 그 뒤에 거울을 세운 후, 주전자를 통해 거울을 보고 있으면 결혼하게 될 남편의 얼굴이 보인다고 한다. ©Lee Myeong Jae



"나는 믿지 않지만, "


이라며 운을 뗀 갈랴는 성 안드레이 축일에 얽힌 친할머니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 안드레이 축일 새벽, 갈랴의 할머니는 대접에 물을 담고 그 위에 두 개의 막대기를 평행하게 놓은 다음,

    

 "수줸느이 모이 랴줸느이 프리지 카 므녜 췌레즈 모스틱"    


이라고 주문을 외운 뒤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내 운명의 사람, 다리를 건너 나에게 오세요."라는 뜻이다. 할머니는 그날 밤 꿈에서 외투를 입은 반듯한 청년을 보았다. 몇 해가 지난 뒤 할머니는 키예프에서 우연히 한 남자와 마주쳤다. 할머니가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사람이었다. 드녜프르 강을 오가는 증기선의 선장이던 그 남자는 갈랴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구소련 시절에 만나 결혼한 갈랴의 부모님에게는 이런 로맨틱한 스토리가 없었다. 갈랴 어머니는 '그냥, 디마가 나한테 왔어.'라고 별것 없었다는 듯 시큰둥 말씀하신다. 


성 안드레이 축일, 우크라이나의 미혼 여성들은 결혼할 나이와 미래의 배우자를 알아내기 위한 의식을 한다. 정교회 신앙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런 전통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수 세기 동안 농한기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던 우크라이나의 소녀들에게 이 날은 가슴 설레며 손꼽아 기다리던 축제와도 같았다. 동방정교회에서 안드레이 사도의 이름에는 '처음으로 부름 받은 the First-Called'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첫 번째로 선택을 받은 이가 바로 안드레이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안드레이는 '남자다운', '강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성 안드레이 축일에 배우자가 될 남편이 누구인지 점을 치는 것은 이 두 가지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나의 첫 남자'를 알아보고픈 소녀들의 로망.


12월 12일 오후 늦게, 올랴가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오늘 밤 12시에 내 옆방 애들 셋이서 점치기를 한다니까 한 번 가봐. 사진 찍어도 괜찮대. 나는 조금 있다가 밤기차 타고 고향에 내려갈 거라서 같이는 못 가고. 이야기해놓았으니까 그냥 가면 돼."  

  

진심으로 고마웠다. 뼛속까지 우크라이나 사람인 올랴는 이렇게 몇 번이나 좋은 정보를 주었다. 나는 학생 기숙사 2층에 별도로 마련된 외국인 강사 게스트룸에 살았다. 내가 가르치던 한국어과 학생들은 다른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아쉬울 때가 종종 있었다. 다행히 옆방 친구, 스페인어과 강사 후안의 학생들이 같은 기숙사 건물에 살았고, 몇 명과는 가끔씩 학교 밖에서 친구처럼 어울리기도 했다. 그 가운데 올랴는 항상 훌륭한 소식통, 편안한 말벗이 되어주었다. 며칠 전에도 올랴와 제냐, 알료샤에게 혹시 기숙사에서 성 안드레이 축일에 남편 알아맞히기 의식을 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던 터였다.   


성 안드레이 축일인 12월 13일이 되기 10분 전, 올랴가 알려준 방으로 올라갔다. 동명이인의 다른 올랴와 두 명의 타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말연시를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향으로 떠나서 기숙사는 고요했다. 늦은 시간까지 기숙사 방과 복도에서 사부작 거려야 했지만, 숙면을 방해받을만한 이웃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타냐 한 명은 <점술 Gadanie>이라는 제목의 책을 몰입해서 읽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것이어서란다. 구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지난 70여 년 간, 한 세기가 채 안 되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수 백 년 간 지속되어 온 고유의 전통, 유무형의 문화유산과 상당 부문 단절되었다. 구소련의 소비에트화 정책은 그만큼 강력했다. 소련 시민으로 태어나서 살아온 타냐의 부모님도, 구소련의 초등교육을 받은 타냐도, 성 안드레이 축일의 전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1991년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치, 문화계에서는 1917년 10월 혁명 이전에 기념하던 여러 축제, 의식 등의 복원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자정이 되자 소녀들의 회합이 시작되었다. 촛불이 흔들거리는 어둑한 방에서 낯선 여성들의 의식에 동참하려니, 무슨 비밀결사 모임에 참석한 것처럼 살짝 긴장이 되었다. 첫 번째 의식으로 세 사람은 물을 가득 담은 투명한 유리 주전자를 탁자 위에 놓고, 그 뒤편에 거울을 세웠다. 의자에 앉아 주전자를 통해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래 배우자의 얼굴이 거울에 나타난다고 한다. 인내심을 요하는 점술이었다. 그래도 모두 '남편 될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데, 이 정도쯤이야.'하는 얼굴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긴 시간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솔직히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혹시나, 거울에 정말로 낯선 남자 얼굴이 떠오르는, 그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책에 나와 있는, 미래의 배우자 얼굴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저녁 식사 중에 빵 한 조각을 떼어내서 식탁보 밑에 놓아두었다가, 식사 후 자리를 뜨면서 빵 조각을 꺼내 방으로 들고 간 다음, 잠자리에 누워 그 빵 조각을 베개 아래 놓고 '내 운명의 사람, 내게 먹으러 오세요.'라고 주문을 외운 후 잠드는 것이다. 그러면 꿈에 결혼할 남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나는 덧붙여 갈랴 할머니의 사례와 방법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머리카락에 묶은 반지를 물컵에 세 번 넣었다 뺀 후, 유리컵 위에서 반지가 회전하는 숫자가 시집을 가게 될 나이라고 한다. ©Lee Myeong Jae

        


두 번째는 결혼할 나이를 점치는 의식이었다. 타냐는 유리컵에 물을 채운 후 컵 속에 반지를 담갔다 빼냈다.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반지에 묶은 다음, 머리카락의 다른 한쪽 끝을 잡고 반지를 물컵 속에 세 번 넣었다 뺐다. 세 번째로 뺄 때는 반지를 컵 입구까지만 들어 올렸다. 그랬더니 머리카락에 매달린 반지가 빙그르 돌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반지가 유리컵에 부딪히면서 맑고 신비한 소리를 냈다. 빠르게, 때로는 서서히 한참을 돌던 반지가 멈춰 섰다. 반지의 회전 수로 결혼하게 될 나이를 점치는 것이다. 스무 살 동갑내기 두 타냐의 반지는 모두 스물한 바퀴를 돌았고, 다음 주에 스물한 살이 되는 올랴의 반지는 스물네 바퀴를 돌았다. 두 타냐에게 내년 결혼식에 잊지 말고 꼭 초대해 달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소녀들이 물이 담긴 대접에 촛농을 떨어뜨려 결혼하게 될 사람의 이름을 점치고 있다. ©Lee Myeong Jae



세 번째는 촛농과 종이배를 사용해서 남편의 이름을 알아내는 의식이다. 먼저 손가락 크기 정도로 종이를 자른 후 각각의 종이에 남자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성 안드레이 축일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안드레이는 반드시 써야 한단다. 보그단, 유라, 사샤, 세르게이, 이반, 보리스, 미샤, 알렉세이, 안톤, 디마, 이고리...... 이름을 쓰는 그녀들의 입가에 살짝살짝 미소가 스쳤다. 소녀들의 첫사랑, 지금 썸 타고 있는 친구, 고향 옆집 오빠 등등, 한 번이라도 설렘이 있었던 그 이름들이었겠지 싶었다. 그렇게 만든 20여 개의 종이조각을 물이 담긴 대접에 빙 둘러붙였다.


그러고 나서 대접에 촛농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손가락으로 물을 몇 번 휘저었다. 고체 덩어리가 되어 물 위에서 빙빙 돌던 촛농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촛농이 멈춘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름, 그 이름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쪽 끝에 성냥개비를 꽂은 종이배로도 점을 칠 수 있다. 종이배를 활용할 때는 대접 위에서 배를 빙그르 돌리면서 물에 떨어뜨리는 게 핵심이라고 한다. 올랴의 촛농과 종이배는 모두 디마를 가리켰다. 지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미샤였는지, 올랴는 두 번째 종이배로 할 때 '미샤에 걸려라' 주문을 외워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진짜 디마와 결혼할 운명인가 보다. 촛농이나 종이배가 이름표 사이에 애매하게 멈추는 것은 대접에 붙어있지 않은 이름을 가진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두 타냐에게는 한 번씩 그런 점괘가 나왔다. 금발의 타냐는 '혹시 외국인?' 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 외에도 자기 나이 개수만큼 종이조각을 만들어 각각에 남자 이름을 적은 후 베개 밑에 두고 잔 다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종이를 하나 뽑아 미래의 남편 이름을 알아내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한 사람씩 문 밖으로 내보낸 뒤, 침대 위에 반지, 지갑, 인형을 놓고 그 위에 각각 베개를 놓아 보이지 않게 가렸다. 다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방으로 들어와서 베개 하나를 선택해 그 위에 앉는다. 베개 밑에 반지가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고, 지갑이 있으면 부자와 결혼을 하게 되고, 인형이 있으면 아이를 꼭 갖게 된다는 의미란다. 올랴와 타냐는 인형 위에, 다른 타냐는 지갑 위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보여주겠다며 복도로 나갔다.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복도 끝에서 다른 한 편 끝까지 신발 이어가기를 했다. 올랴-타냐1-타냐2-올랴-타냐1-타냐2. 타냐 1의 신발 코가 가장 먼저 끝에 닿았다. 오늘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결혼을 하게 될 거라며 타냐를 축하해주었다.


세 명의 소녀는 점괘를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 의식에 임하는 자세는 매우 진지했다. 과거의 전통을 재현하고, 무언가 우크라이나스러운 의식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어쩌면, 결혼할 남자는 꼭 아니어도 좋은 남자 친구가 정말 간절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방 안에서 누군가 한 명이,


"성 안드레이 축일은 여자들을 위한 날이에요."


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진짜 그랬다. 성 안드레이 축일에 안드레이 사도는 온 데 간데없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만의 안드레이를 찾고자 애를 쓴 소녀들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오늘 밤, 우크라이나 소녀들의 꿈속에 훈남 청년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머지않아 그중에 한 명, 착실한 신랑감을 만나 살뜰히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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