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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Nov 15. 2024

2024. 11. 3.

마흔세 번째 ©Myeongjae Lee

7C142, B737-800

21:20, 탑승구 10, 좌석 9F


©Myeongjae Lee


"나는 항상 과거는 지도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고,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자료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을 이용해 존재에 대한 시적인 사고를 하는 과정 중에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내가 태어나서 한 일이 이것뿐일지라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들을 찾기로 결심했다.

<시처럼 쓰는 법 - 나의 일상을 짧지만 감각적으로>(재클린 서스킨, 인디고) p.157


어쩌다 보니 하루동안 카페 <무화과한잎>에 아내와 함께 두 번이나 갔다. 길게 머물렀던 두 번째 방문에서 <시처럼 쓰는 법>을 후다닥 읽었다. 정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좋았다. 카페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은 아니어서 얼른 온라인서점 앱 보관함에 담았다. "'내가 태어나서 한 일이 이것뿐일지라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들을 찾기로 결심했다"는 구절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하나를 나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주 오랜만에 제주 도심에 나왔다. 칠성로를 직접 걸어보는 것은, 사실 처음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다른, 새로운 공간"에 발을 디딘 것뿐인데, 무언가 낯선 곳에 여행 온 기분, 무언가 리프레시되는 기분이 들었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 먼 길인 데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좀 더 자주 나와야겠다.

이전 회사는 서귀포시에 있었는데, 제주시 출신 후배들이 아주 드물게 "우리 시"라는 표현을 썼던 게 기억났다. 오늘은 왠지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시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후배 한 명은 "입사하기 전까지 서귀포에 와 본 적이 두어 번밖에 없었다."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제주시로 마실 가는 게 엄두가 안 나는 것처럼, 제주시민들에게도 서귀포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전히 '먼' 곳인 것 같다.


아내와는 북카페 <무화과한잎> 앞에서 만났다. 아내는 차로 왔고 나는 대중교통으로 왔다. 아내는 큰 아이와 친구 두 명을 차에 태워 탑동광장 근처에 내려준 뒤 주차를 하고 왔고,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급행버스와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급행버스 한 대를 놓치면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어서 집에서 정류장까지 숨이 차도록 내달렸다. 제주시청 앞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내려서 15분을 또 걸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덕분에 핸드폰 앱의 움직이기, 운동하기, 일어서기를 일찌감치 가뿐히 달성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다소 무리했다는 것을 몸도 뒤늦게 알게 되었는지, 거의 다 와서 속이 너무 아팠다. 눈앞의 에이바우트에 잠시 들러 화장실을 좀 빌렸다. 아내와 만나서 <온차>에서 돈가스와 오므라이스로 고픈 배를 달래고, <고씨주택&제주책방>을 잠시 둘러보았다. <무화과한입>에 가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했다. 다음엔, <제주대중음악 FESTA Rookie Stage 2024> 공연장에서 밴드공연을 구경하고, <산지천갤러리>로 향했다. "제주미술제" 일부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주의 풍경들이 반가웠고 잠시나마 우리를 세화해변으로, 가파도로, 숲으로 데려다주었다. 갤러리에는 사진작가 김수남관도 있었다. 거칠면서도 강렬한 그의 “말과 글”이 상설관에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은 그 시대의 인물과 사회현상, 문화 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의 말이자 글입니다."

(김수남, 세계일보 인터뷰 중)


그리고 다시 <무화과한잎>.

아이의 연락을 기다리며 책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멍도 때리면서 길게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제주공항에 내려주었다. 이번 주에는 아내와 큰 아이의 배웅을 받았다. 아이는 오늘 아침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아빠가 배 타고 육지에 가려고 하는데, 날씨가 안 좋아서 못 가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은 반대라고, 아이의 따뜻한 배웅을 받을 날로 점지되어 있었나 보다.


©Myeongjae Lee


이른 아침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 은은한 은목서 향을 만났다. 계절마다 제주의 향이 시시각각 다채롭다는 것도 좋다. 어제저녁에는 끓는 물에 소면을 넣다가 손가락까지 같이 담가버렸다. 화상 부위가 쓰렸는데, 그래도 순식간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런지 다행히 물집이 잡히지는 않았다. 통증도 잦아들었다. 화상을 입은 것보다, 화상을 입었다는 것 자체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운동감각과 인지능력을 이렇게까지 잃은 것에 속이 상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와중에 큰 아이는 "오른손 손가락이 아니니까, 아빠, 완전 러키비키잖아!"라며 위로를 한다.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아무튼.

비행기 사진 찍기에 9번 열은 영 아닌 것 같다. 다음부터 이 자리는 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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