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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Apr 16. 2018

“며칠만 재워주세요”로 시작된 인생 최고의 크리스마스

014.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낳다 / 2004.1.5. 바로흐타

카르파티아 산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바로흐타 마을 ©Lee Myeong Jae


“아주머니 댁에 며칠만 머물면 안 될까요?” 

“우리는 민박을 하는 그런 집이 아니에요. 관광객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저는 스키 타러 온 게 아니라, 카르파티아 산맥의 진짜 성탄절을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 집은 산 중턱에 있어서 오가기도 힘들고, 화장실도 그렇고 여러모로 불편해요.” 

“우크라이나 보통 가정에서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는지 꼭 보고 싶어요. 아주머니 댁이었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릴게요.” 

  

몹시 난감한 표정의 아주머니는 집에 전화를 하시더니,  


“추워요, 갑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바로흐타 마을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진짜 우크라이나스러운 성탄절을 보려면 카르파티아에 가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은 폴란드,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등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데, 우크라이나 서부지역도 살며시 지나간다. 며칠이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바로흐타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정보통인 갈랴에게 전화를 했다. 그곳에 가야 할 운명이었는지, 갈랴는 지난 여름휴가를 카르파티아 산골 야블루니차 마을 민박집에서 보냈는데, 그 가족의 친척이 바로흐타에 산다고 들었다며 전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서 바로흐타에 살고 있는 로만네 전화번호를 얻어냈다. 출발하기 하루 전 로만과 통화를 했다.


“1월 5일 아침에 바로흐타에 도착해서 전화할게요.”  


동슬라브 정교회(正敎會, Orthodox Church)의 성탄절은 1월 7일이다. 종교 축일은 여전히 구력인 율리우스력을 따르기 때문이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서는 공휴일도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새해인사를 할 때 동슬라브 문화권의 사람들 대부분은,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보다는 Happy New Year & Merry Christmas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새해는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그레고리우스력으로, 성탄절은 정교도들과 더불어 율리우스력으로 맞이하는 독특한 사람들이다.


바로흐타의 스키장 쪽에서 바라본 바로흐타 마을 전경 ©Lee Myeong Jae


1월 4일, 일요일 저녁. 여느 때와 같이 역전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기차에 올랐다. 다소 무모한 여행이기는 했다. 12일 아침에 한국어과 학생들 기말고사를 봐야 하는데, 이동이 많은 연초라서 키예프로 돌아오는 표를 구입하지 못했다.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문득,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별 하나만 보고 무작정 먼 길을 떠나야 했던 동방박사들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카르파티아의 동슬라브인들이 그분의 탄생을 어떻게 기념하고 축하해왔는지 보기 위해 떠난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고 마음도 조금 편안해졌다. 뭐, 어떻게든 시간 맞춰 돌아올 수 있겠지.     


기차는 19시 12분에 출발했다. 연초라서 그런지 가족 단위로 이동하는 승객들이 많았다. 기차 객실은 덜 소란스러웠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50대와 20대로 보이는 부녀와 함께 객차 한 칸을 쓰게 되었다. 4개의 침대가 좌우 2층으로 설치되어 있는 기차 칸 안에서 술 취한 막무가내 아저씨들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슬립 하나 달랑 걸친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가씨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후덥지근한 평온. 아저씨가 우크라이나어로 농담 비슷이 건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딸은 러시아어를,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어를 했다. 혼란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갑자기 우크라이나어로밖에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바로흐타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가끔씩 거슬리는 아저씨의 빈정댐 빼고는 그런대로 나무랄 데 없는 여정이었다. 카르파티아의 관문 이바노프랑콥스크 역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아침 8시 22분. 이제 13시간 정도의 여정은 가뿐하다. 물어물어 마르슛카 정류장을 찾아갔다. 카르파티아 산골 이곳저곳으로 향하는 미니버스들이 기차 도착시간에 맞추어 줄줄이 서있었다. 8시 40분, 베르호빈나 행 미니버스에 올랐다. 혹여나 내리는 곳을 놓칠까 봐 기사 아저씨에게 몇 번이나 부탁을 했다. 그리고 10시 40분, 드디어 바로흐타에 입성했다. 


바로흐타 마을 중앙의 미니버스 정류장(위), 카르파티아 산골 마을들을 잇는 철길(좌측아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스키어들(우측아래) ©Lee Myeong Jae


바로흐타는 일종의 리조트 같은 곳이었다. 겨울에 이 곳에 오는 외지인 대부분은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마차에 스키장비를 싣고 가는 사람들, 어깨에 스키를 메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마을 복판에는 공중전화가 한 대 뿐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은지.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만 간다. 실패. 다시 전화를 하려고 줄 맨 뒤로 갔다. 또 한참을 기다렸다. 드디어 로만의 부친, 보그단 아저씨와 통화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리입니다. 바로흐타에 도착했습니다. 우체국 앞이에요.”  


그 사이 소변을 더 이상은 못 참겠어서, 부끄럽지만, 우체국 뒤편으로 돌아가 노상방료를 했다. 그러고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로만의 여동생 보그다나였다. 갈랴가 외국인이라고만 해서, 자기들은 내가 백인일 것이라 생각했다고, 그래서 외로운 백인만 한참을 찾았다는 거다. 흩어져서 나를 찾던 로만과 나탈리아 아주머니와도 곧이어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의사소통에 오류가 있었던 게다. 로만네 집에 머무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탈리아 아주머니는, 


“흐음, 얼른 민박할 집을 알아봐 줄게요.” 

“네?” 


아주머니는 잠시 기다리라며 이집저집 아는 집들을 뛰어다니고 몇 군데 전화를 해보더니,  


“아이고, 요즘 연휴기간이라 빈 집이 하나도 없네. 잠시만요. 좀 더 알아봅시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아주머니와 로만, 보그다나를 보니 너무 좋은 사람들 같았다. 무조건 그 집에서 성탄절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사람을 받을 수 있는 민박집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시내에서 로만 네 집으로 올라가는 산길 ©Lee Myeong Jae
로만네 근처. 외양간 지붕을 수리하고 있는 보그단 아저씨(우측위), 순박한 웃음으로 맞아준 막내 미콜랴(좌측아래), 겨우내 사용할 장작더미(우측아래) ©Lee Myeong Jae


로만과 보그다나, 나탈리아 아주머니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소음과도 점점 멀어졌다. 고요했다. 문득, 2000년 전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선한 마구간 주인과 로만네 가족이 오버랩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로만 네 집에서 숙박을 제공받은 최초의 외부인이 되었다. 바로흐타 마을 다수의 집들은 겨울 스키어들과 여름 등산객들 민박을 치면서 부수입을 얻는다. 하지만 로만 네는 달랐다. 외지인들 때문에, 그리고 금전적인 수입 때문에 자신들의 단란한 일상과 종교생활이 방해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보낼 민박집이 없어서긴 했겠지만,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받아준 것인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이 성탄절 금식 기간이라서...... 그리고 내일(1월 6일) 우리는 첫 별이 뜰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어떡해야 하나.” 


동방정교회의 금식은 개신교의 금식 개념과 좀 다르다. 육류와 유제품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먹을 수 있다. 물론, 성탄절 전야나 부활절 전야 등 주요 금식일에는 물만 마시는 엄격한 금식을 하기도 한다. 어느 방식이 더 낫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동방정교회의 방식이 오히려 금식의 정신과 의미가 강조되는 금식인 듯도 하다.


“저도 금식에 동참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극한 상황이었나. 우크라이나어가 생각보다 잘 이해되었다.  

그 사이 집에 도착했다. 아담한 목조 전통 가옥이었다. 방이 2개, 침대가 도합 4개였다. 왼편 방에는 로만과 보그단 아저씨의 침대가 각각 하나씩 있었고, 오른편 방에는 나탈리아 아주머니와 막내 미콜랴가 한 침대를, 딸 보그다나가 소파베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그단 아저씨는 나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옆방으로 옮겨가셨다. 죄송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런. 완전히 민폐군.’ 


로만 네 집 실내 ©Lee Myeong Jae


로만은 이바노프랑콥스크대학교 법학과 1학년 학생이다. 법률가나 국회의원이 되고픈 바른생활 청년이다. 로만의 여동생 보그다나는 졸업반인 11학년으로, 그림을 잘 그린다. 8살 막내 미콜랴는 비행사가 꿈이란다. 매우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었다. 보그단 아저씨는 특별한 직업은 없으시다. 이런저런 가정일을 돌보면서 이따금씩 산에서 약초 등을 캐서 판다고 하신다. 그리고 판매용은 아니지만 공예품을 아주 잘 만든다고 한다. 나탈리아 아주머니는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가게를 반나절씩 봐주시는 것 같다. 로만의 할아버지는 바로 근처에 사시는데, 우니아트 교회라고도 하는 그레코-가톨릭교회의 부제로 일을 하셨고, 카르파티아 산맥의 구출 Gutsul 민족에 관한 책도 쓰셨다고 한다. 외양간에는 소가 4마리, 닭과 토끼가 여러 마리 있었다. 1년에 2,000 그리브나가 드는 로만의 대학교 학비 마련을 위해 작년에 양 한 마리를 팔았다고 한다.


허기가 밀려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 눈 깜짝할 사이 나탈리아 아주머니는 감자와 계란을 가져다주셨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어찌 아셨는지 저녁에는 갈룹치를 해주셨다. 금식 기간이라 양배추에 고기 대신 여러 가지 야채와 버섯을 넣고 만들어 주셨다. 로만과 나에게는 손님 상을 차려주셨고, 나머지 가족들은 옆방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 이 신심 깊은 가정에, 그것도 일 년 중 가장 크고 의미 있는 종교 축일 주간에 이교도 이방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안방까지 차지하고 누워있는 형상이다. 나 같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스찌쁘리임느이’, ‘손님 접대를 후하게 하는’이라는 뜻의 이 형용사가 동슬라브인의 특성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라고 배웠는데, 정말 그랬다.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성탄절 주간을 나 때문에 망치면 안 된다는 조바심, 진짜 살아있는 동슬라브인의 크리스마스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사방팔방으로 교차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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