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차원 행복 논의

기울기와 참조집단, 숫자로 보이지 않는 것들

by 김명준

저번 달 13일 브런치 글에서 나는 호르몬의 작용으로 행복을 설명해 보았다. 신경생물학은 매혹적이지만, 글을 내보낸 직후 곧바로 불편을 느꼈다. 호르몬 농도가 체온처럼 계량되는 순간 사람들은 '행복 72점, 불행 65점'이라는 숫자를 서로 비교하고, 점수를 올리기 위해 더 강한 자극이나 더 많은 소비를 찾아 나선다. 그런 점수 놀이는 낭만을 앗아 가고, 행복을 현금처럼 돌려 쓰는 거래 대상으로 만든다. 마치 사랑을 혈압계로 재려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연애 초반에 느끼는 설렘을 떠올려 보자. 처음 손을 잡을 때 분출되던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은 얼마 안 가서 잦아든다. 그러나 설렘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익숙함 속에서 쌓인 신뢰, 함께 보낸 시간의 밀도,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은 초반의 흥분보다 훨씬 더 깊고 안정적인 만족을 만들어 낸다. 커피를 함께 마시는 평범한 아침이, 첫 데이트의 두근거림보다 더 소중해지는 순간이 있다. 호르몬 반응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더 크고 성숙한 애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호르몬이 행복의 전부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점을 명쾌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 이번 글은 호르몬 환원주의에서 한 발 물러나, 행복을 "기울기"라는 관점으로 다시 살펴보려 한다.


'기울기'란 앞으로의 방향, 곧 어제와 오늘 사이의 변화량을 뜻한다. 절대 위치가 어디냐보다 그래프가 위를 향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성장 신화가 뜨겁던 197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겨우 250달러 남짓이었지만 두 자릿수 성장률이 던지는 기대감 덕분에 사람들은 내일을 기다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시절 사람들의 눈에는 희망이 반짝였다. 반면 2024년의 우리는 3만 6000달러 안팎의 소득을 누리면서도 2%대 성장률, 저출산·고령화·기후 위기를 동시에 걱정한다. 절대적 풍요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까닭은 높은 위치가 아니라 완만해진 기울기에 마음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잃을까 두려운" 심리가 작동하는 순간, 과거에 익숙해진 상승선이 멈추거나 꺾이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즉시 위협을 감지한다.


100년 전 갑부와 현대 중위소득층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할까? 당시 최고 부자는 전속 요리사와 운전사를 거느리며 전등과 전화라는 '신문명'의 정점에 있었다. 불편이 많았어도 그는 시대 평균을 압도했고, 자신의 그래프는 여전히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허용되었다. 반면 오늘날 평균적인 한국인은 항생제·에어컨·스마트폰을 기본값으로 누리지만, 비교 집단이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SNS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수평선 아래에 놓인 것처럼 느낀다. 손가락 끝에서 펼쳐지는 타인의 화려한 일상이 우리의 평범함을 초라하게 만든다. 여기서 핵심은 "비교 가능한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다. 100년 전의 갑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깨끗한 수돗물이나 인터넷 같은 선택지를 아예 몰랐다.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은 비교 항목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상위 집단'이 실질적으로 부재했다. 반대로 우리는 지구 반대편 럭셔리 라이프를 손 안에서 실시간으로 스크롤하며, 상상조차 어려운 격차를 매 순간 인지한다. 행복의 체감은 절대적 수준만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설정한 '참조 집단'의 범위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이 대목에서 ‘돈이 많으면, 멋진 삶을 살면 행복하다’는 직선 공식을 시험대에 올려볼 수 있다. 충분한 생계비는 필요조건이지만 의미와 전망이 빠진 풍요는 곧 허기와 같아진다. 배는 부르지만 마음은 공허한 상태. 마약이나 도박처럼 도파민만 폭발시키는 자극은 순간적 쾌락을 남기고 삶 전체의 그래프를 곧바로 꺾어 버린다. 반대로 주말 봉사활동이나 석 달짜리 사이드 프로젝트처럼 작지만 지속적으로 성장과 기여를 체감하게 해 주는 경험은 ‘질’과 ‘방향’ 두 축을 함께 끌어올려 기울기를 완만하게라도 꾸준히 위로 밀어 올린다. 요컨대 즐거움의 ‘양’만 급등시키는 선택은 총체적 행복을 제로에 수렴시키지만, 질과 방향을 함께 확장하는 선택은 작은 상승선을 오래 유지하게 만든다.


결국 행복은 한 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정한 물질적 기초가 무너지면 불안이 솟고, 의미나 전망이 사라져도 활력은 증발한다. 수학 언어를 잠시 빌리자면, 행복은 최소한 '양·질·방향'이 결합된 다차원 좌표계 위에서 정의된다. 이 좌표가 의미 있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고정값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같은 연봉, 같은 도시, 같은 호르몬 수치를 지닌 사람도 무엇을 값지고 의미 있다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래프를 그린다. 행복의 원천이 사실상 자기 정의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같은 비 내리는 오후에도, 어떤 이는 우울해하고 어떤 이는 평온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므로 행복을 더 정확히 재는 방법은 숫자를 세는 일이 아니라 기준선을 다시 긋는 일이다. 거대한 목표 대신 짧은 구간의 개선을 인식하면 기울기는 다시 우상향 하기 시작한다. 오늘 어제보다 10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면, 그것도 하나의 상승선이다. '의미 있다'라고 느낀 순간을 기록하면 질적 토대가 두꺼워지고, 비교 대상을 타인의 화려한 피드가 아니라 어제의 나로 바꾸는 순간 그래프는 갑자기 살아난다. 그렇게 보면 호르몬 연구도, 성장률 통계도 분명 쓸모가 있다. 단지 우리는 행복을 완전히 수치화하려는 유혹에 넘어가는 대신, 숫자가 보여 주지 못하는 방향과 해석하려는 '나'의 의지를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


행복은 그림자처럼 숫자에 비치지만, 숫자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프가 1도만 위를 향해 있어도 우리는 충분히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 1도를 어디로, 왜 올릴 것인지는 각자가 선택하고 정의해야 한다. 자신의 현재 절댓값에 무관하게, 기울기를 스스로 설계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여전히 작은 상승선으로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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