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농촌, 통합적 관점에 대해
도시는 한눈에 보기에 빛난다.
매끈한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전기버스, 아름다운 가구로 꾸민 카페, 앱 하나면 배달되는 저녁 식사, 냄새 한 점 새지 않는 하수관. 이 모든 세련된 표면은 마치 우리 삶이 영원히 깨끗하고 매끄럽게 흘러갈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시각에 따르면, 이러한 ‘건조한’ 세계는 인간 실존의 절반만을 보여 줄 뿐이다.
융은 시골에서 자라며 흙과 똥, 죽음이 순환하는 풍경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밭에 뿌려진 인분이 채소로 돌아오는 과정을 보며 그는 환멸이 아니라 통합을 배웠다.
인체와 토양, 삶과 죽음, 고상함과 추함이 하나의 호흡으로 얽혀 있다는 감각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진리였다. 반면 도시의 최첨단 인프라는 이러한 순환 고리를 시야에서 제거한다.
우리가 방금 내보낸 배설물은 하수처리장으로 사라지고, 포장된 샐러드는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도 무균 상태로 식탁에 오르며, 장례식은 전문 업체의 손에 맡겨 표준화된 절차 속에 완충된다.
융의 통찰은 날카롭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도시의 구조적 특성이 현실 인식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은 맞다. 그러나 도시 고유의 다층적 경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수십 개의 서로 다른 삶의 궤적, 24시간 돌아가는 응급실에서 목격하게 되는 생과 사의 경계, 다양한 계층과 문화가 뒤섞인 거리에서 체감하는 사회적 모순들. 이런 경험들은 농촌의 자연적 순환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똑같이 강렬하게 현실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농촌에서도 마찬가지다. 흙과 똥의 순환을 목격한다고 해서 모든 이가 통합적 사고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좁은 공동체 안에서 편견이 고착화되거나, 제한된 정보 환경에서 시야가 협소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대로 도시에서도 의료진이 되어 매일 인간의 취약성과 마주하거나, 사회복지사가 되어 소외계층의 현실을 직면하거나, 기자가 되어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개인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통합하느냐 하는 문제다. 경험의 장소는 단서일 뿐, 통합적 의식은 훈련과 성찰로 길러지는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순환을 직접 목격하고, 노동의 결과가 구체적 생산물로 나타나는 과정을 경험하며,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농촌의 경험은 인간의 감각을 예리하게 만든다. 융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인분이 채소가 되는 과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란 사람과, 그런 과정이 모두 시스템 뒤편으로 숨겨진 채 자란 사람 사이에는 현실 인식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문제는 도시가 이런 현실 인식의 기회를 구조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이다. 음식의 경로와 노동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공급망, 죽음과 배설을 완벽히 은닉하는 위생 시스템, 고통을 광고로 포장해 서사로 소비하는 미디어 환경은 우리에게 ‘불편한 현실을 삭제할 자유’를 제공한다.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런 편의성에 안주하며 현실의 이면을 의식적으로 외면하게 될 때다.
얼마 전, 나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이런 이면에 대해 생각했다. 높이 솟은 빌딩들의 창문마다 불빛이 밝게 비추고 있었고, 그 빛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광휘가 특별히 눈부신 이유는, 누가 왜 저 불빛을 켜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근의 고단함, 치열함, 희망, 불안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을 때, 단순 전구를 넘어선 고차원적 아름다움. 즉 삶의 복합성을 포괄한 아름다움이 비로소 탄생한다. 그저 빛만을 소비하는 눈은 아름다움의 절반만을 본다. 나머지 절반은 빛 뒤편에 도사린 현실을 감지할 줄 아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이따금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아이들에겐 이런 세상의 어두운 면을 너무 빨리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이 밝은 불빛만 기억하게 해 주고 싶다”고.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아니, 정말 그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야경의 아름다움은 그저 빛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수많은 삶의 서사가, 감정의 조각들이 겹겹이 스며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잃는다면, 결국 남는 것은 단지 전구의 조도와 색온도일 뿐이다. 삶은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다. 불빛이 의미를 갖기 위해선, 그 아래에서 깨어 있는 인간의 이야기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그런 감수성은 애써 차단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현실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며, 그것을 해석하고 소화하는 언어를 익힐 때 생겨난다.
어떤 사람은 말할지도 모른다. 현실은 어차피 커서 겪게 될 테니, 어린 시절만큼은 무균실처럼 만들어주는 것이 보호라고. 그러나 이후 마주하는 현실은 더 이상 훈련용이 아니다. 되돌릴 수 없고, 누군가가 옆에서 단어를 번역해주지도 않는다. 고통은 갑작스러운 언어로, 겁에 질린 몸으로 찾아온다. 문제는 그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다뤄본 적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조금씩,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 삶의 모순과 결핍, 불완전함을 해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작은 불편을 지나치지 않고 질문으로 바꾸는 능력, 감정의 잔상을 언어로 연결하는 힘,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진 세계관을 뒤흔들 줄 아는 유연함이야말로, 미래의 복잡성을 견디는 진짜 면역력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직접 그 아픔을 전해 줘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고통을 주입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작은 불편과 모순을 의도적으로 지워 버리는 대신 아이가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질문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괴로운지’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괴로움과 아름다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여전히 살 만하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준다. 이렇게 조율된 노출은 거대한 고통을 미리 주는 것이 아니라, 감당 가능한 크기의 현실을 언어, 행동, 공감으로 다루는 연습을 선물하는 일이다. 이는 아이를 위기에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번역하고 조율할 기초 문법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마찬가지로, 행복이나 즐거움도 마치 자동판매기에서 뽑아 드는 캔 음료처럼 기계적으로 당연시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깊이 있는 즐거움은 대조면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아이가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음식의 풍미를 깊이 느끼듯, 불안과 실패의 작은 진동을 이해할 때 기쁨과 성취의 손맛은 더 진해진다.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고도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능력, 그것이 성숙의 첫 징후다.
건강한 정신은 밝음과 어둠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지식이 아닌 감각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도시에서라도 직접 재료를 손질하며 음식의 경로를 더듬어 보고, 화분 하나라도 흙냄새를 맡으며 키우고, 육체를 땀으로 적시며 몸의 한계를 느끼고, 타인의 고통과 마주하며 내 안의 편견을 뒤흔들어 보는 일. 이런 작은 경험들이 모여 현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만든다. 시골 들판을 가르며 해가 솟을 때 느끼는 압도적 생기든, 서울 새벽 버스 창밖으로 번지는 도시의 첫 불빛이든,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요리한 식탁 위 수증기든, 이 빛나는 장면들은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감각된다.
그런데 이런 감각은 정말 훈련으로 기를 수 있는 것일까? 최근 한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코로나 시기에 처음으로 집에서 빵을 구워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반죽을 치대며 손에 전해지는 밀가루 반죽의 질감을 느끼고, 발효 과정에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오븐에서 나오는 갓 구워진 빵 냄새를 맡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빵 하나가 내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이 필요한지 처음 알았다.
밀을 기르는 농부, 밀가루를 만드는 공장, 이스트를 배양하는 과정,
심지어 오븐의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까지.
그전엔 그냥 편의점에서 사 먹는 게 당연했는데."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융이 말한 '통합적 감각'이 거창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 경험의 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빵을 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현대 도시의 복잡한 공급망을 체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다고 했다.
비슷한 경험을 또 다른 지인에게서도 들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던 중 처음으로 베란다에서 상추를 길러보기 시작한 그는, 매일 아침 화분을 들여다보며 생명의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게 되었다.
잎이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벌레가 생겼을 때 농약을 쓸지 말지 고민하면서,
농부들이 얼마나 복잡한 판단을 매일 해야 하는지 처음 이해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깨닫는 것은, 현실의 복합성의 인식은 시골이던 도시던 공간에 무관하며, 복합성을 인식하는 감각이 특별한 철학적 수행을 통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일상의 작은 불편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끝까지 경험해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빵을 사 먹는 대신 직접 만들어보기, 배달 앱 대신 직접 장을 보며 요리하기, 에어컨이 아닌 자연 바람으로 더위를 견뎌보기. 이런 경험들은 각자 작은 마찰을 동반한다. 시간이 더 걸리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고, 때로는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마찰의 순간에 우리는 그동안 시스템 뒤편에 숨겨져 있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직접 반죽을 치대본 사람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빵의 효율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고, 동시에 그 효율성이 무엇을 희생으로 하여 이루어지는지도 짐작하게 된다. 이런 감각이 쌓이면서 우리는 편의와 효율 뒤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노동들, 생략된 과정들에 대해 상상력을 갖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경험이 도덕적 우월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직접 빵을 구워본다고 해서 편의점 빵을 사 먹는 사람들을 비판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직접 해보니 얼마나 번거롭고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번거로움을 대신 감당해 주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세계는 완벽한 선택지들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편의를 선택하면 무언가를 놓치게 되고, 직접성을 선택하면 효율을 포기해야 한다. 농촌의 자연적 순환을 그리워하며 도시를 떠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도시가 제공하는 다양성과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완벽한 해답은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 선택인지 좀 더 정확히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조율의 과정이다. 때로는 편의를 선택하되 그 대가를 의식하고,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며 직접 경험해 보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융이 말한 '통합'의 실제 모습이 아닐까. 농촌과 도시, 편의와 직접성, 효율과 의미 사이에서 완벽한 종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결국 우리가 마주한 세계는 정제된 ‘선’도, 절망적인 ‘악’도 아닌, 둘의 짙은 농도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농촌과 도시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어느 환경에서든 현실의 복잡함을 외면하지 않는 시선과 그 전체를 감당하려는 내적 강인함을 기르는 것. 그것이 오늘날 가장 필요한 감수성이며,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