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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박민규

자본주의와 제로섬 게임

by 김명준



노직과 롤스는 부의 공정한 분배를 이루기 위해 정부의 재분배 정책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차이가 있는 것이 자연상태라는 것이며, 인위적 개입에 의한 조정은 오히려 부정의라는 것이다. 부는 제로섬 게임일까? 누군가 부유해지면, 누구는 가난해져야 할까?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있는 현재 상태를 탈피할 순 없을까?






수금지화목토천해

태양계(太陽系, Solar System)는 우리 은하의 오리온자리 나선팔에 위치한 행성계로, 모항성인 태양을 중심으로 8개의 행성과 왜행성, 그 밖의 위성 및 소행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인들은 좋겠다. 그해 여름은 너무 무더워,
나는 늘 그런 상념에 젖고는 했다.


'나'는 무더운 여름에 '덥지도 않고, 머나먼' 화성을 부러워했다. 태양광선은 수성에 먼저 도달하고, 그다음 금성, 지구, 화성 순으로 도달한다. 시간은 거리를 속력으로 나눈 값이므로, 빛의 속도는 일정할 때 오로지 태양과의 거리에 의존한다.

태양과 행성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행성은 단위면적당 더 많은 빛을 쬔다. 그러므로 태양과의 거리가 지구보다 먼 화성을 부러워하며, '나'는 자신을 '조금 나아 보이는'대상과 비교한다.


금성인들은 좋겠다. 그해 겨울엔 혹한이 닥쳐,
나는 늘 그런 상념에 젖고는 했다.


겨울에는 춥기 때문에 태양과 가까운 금성을 부러워한다. 나는 그가 여름에는 천왕성이나 해왕성을 떠올리지 않고, 겨울에는 수성을 떠올리지 않은 것에 주목했다. 왜 하필 화성과 금성인가?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항상 비교 대상은 '자기보다 조금 나은'것이 되기 마련이다. 100등은 60등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60등은 30등을 부러워하며 2등은 1등을 부러워한다. 심리학의 '사회적 비교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과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그들의 성취가 자신에게도 도달 가능한 목표로 보이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너무 멀어서 결코 닿지 못하는.






이러면서 세상을 배운다

시간은 금이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벤자민 프랭클린이 "시간은 돈이다"라고 말한 것을 사람들이 '시간은 금'이라고 바꿔 쓰면서 격언이 된 말이다. 시간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이다.


주유소에선 시간당 천오백 원을, 편의점에선 천 원을 받았으므로 나는 늘 불만이 가득했다 그게 그러니까, 시작 때완 달리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편의점의 사장은 이러면서 세상을 배운다 -라고 말했지만, 이천 원씩 받고 배우면 어디가 덧나나? 뭐야, 그럼 당신 자식에겐 왜 팍팍 주는데?를 떠나서 - 못해도 이천 원 정도의 일은 하고 있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글쎄 천 원이라니. 덥기만 덥고. 짜디짠, 지구.


소설에서 주인공은 말 그대로 시간을 돈으로 취급한다. 주유소 알바는 한 시간에 천오백 원, 편의점 알바는 한 시간에 천 원, 푸시맨은 한 시간에 삼천원인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산수이다.

무엇이 그의 산수를 만들었을까? 바로 그의 환경이다. 가난한 계층으로 살아온 아버지에 의한 대물림이다. 아머비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형태의 자신만의 산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산수 따위가 아니라 수학(數學) 정도일 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주유소 알바를 처음 시작할 때도, 편의점 알바를 처음 시작할 때도 불만이란 없었다. 그 일을 하는 동안의 시간의 가치를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을 하면서, 그 시간에 대해 더 값비싼 금전적 보상을 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그것을, 그 슬픈 진실을 우리는 깨우쳐야 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은 대개 착각이다. 자신의 환경 탓을 하며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자세를 고쳐 앉고 뭐라도 더 하는 게 낫다. 그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돌아오기 마련이다.






신체의 안전선, 삶의 안전선

현대그룹의 창업주 고(故)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안전선 안에서 안주한다고 하여 반드시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다. 또 기업에 있어 제자리걸음은 후퇴와 마찬가지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주인공이 푸시맨 알바를 하면서 하게 된 생각이다. 안전선 밖에 있다면 물론 안전하다. 죽을 일은 없다. 그런데, 괜찮은 삶을 살기에는 부족하다. 괜찮은 삶을 사려면 안전을 보장하는 그 선을 넘어서 안전하지 않은 구역을 지나, 전철 안으로 진입해야만 한다. 아무리 안전선 안에 있더라도 언제나 그곳에 있을 수만을 없다. 전철에 이미 자리가 없더라도, 타야만 하므로 신체의 안전을 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푸시맨 일을 하고 나서 인류의 분실물들을 수거하며,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시 화성을 부러워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핑계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동물이 파아 파아 옆구리를 찢어대고 토해내는 인류의 참상을 목격하는 대가로서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에 기인해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연산(演算)의 답

소설에서 '산수'는 단순히 숫자를 더하고 빼는 연산의 의미를 넘어, 주인공이 속한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를 숫자로 평가하고 계산하는 비인간적 시스템을 상징한다.


어쩌면 그날 나는'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연산의 답은 무엇일까. 답은 기린이 되는 것뿐이었을까. 주인공도 나중에는 기린이 될까. 그것은 정말 빠져나올 수 없는 챗바퀴일까. 현실일까. 어느 질문에도 쉽게 답하지 못하는 건 그게 아니길 바라는 심정 때문일까.


수학이 그렇듯 연산에는 답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는 답이 없다. 아니 답이 없다기보다는 답이 다양하므로 정해진 답이 없다. 그런데 주인공이 기린이 되지 않는 답을 택할 수는 있는가?


그냥 모르겠고 답하기 싫다. 말로 꺼내기 싫어서, 그냥 어딘가 좀 불편해서, 단정 지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은 그냥 외면하는 길을 택한다.


나도 다르지 않은가 보다. 그렇게 또 다른 기린이 태어나겠지.






이 부근의 어느 지붕

코치 형은 본드를 한창 했던 인물이다. 본드의 주성분은 디메틸트립타민(DMT)이며, 이 물질은 인간의 뇌 내에서도 발생한다. 하지만 본드를 매우 높은 농도로 흡입하면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강렬한 환각 체험을 하게 된다. 코치 형은 어느 날 본드를 하고 공중에 떠서 지붕 위에 떠 있게 된다.


어쨌거나 그 일이 있고 나서, 나 완전히 딴 사람이 돼버렸어. 본드도 끊고, 이유는 잘 몰라. 혹시 언제라도 빠져나가. 이 부근의 어느 지붕에 떠 있으면 어쩌지? 그래서 열심히 사는 거 외엔 방법이 없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이 부근의 어느 지붕요? 응,

이 부근의 어느 지붕


지붕은 집의 천장이며 가림막이다. 가장 높이서 집 안에 있는 것들을 지키는 것. 자기 위에는 아무것도 없이 광활한 세상만이 있어서, 혼자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거. 편의점 알바도 푸시맨도 아닌 가장이라는 그 숭고한 직업은 숭고한 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


코치도 주인공이 겪었던 것과 같은 맥락의 일을 겪은 것이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 것. 그 이후로, 그 책임감으로,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만 할 것들을 위하여 본드를 끊는다. 끊어낸다. 철이 드는 것일까.





마치며

어느 봄날 주인공은 역에서 기린을 본다.

그러니 돌아오세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구름의 그림자가 또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지, 그럼 한 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것만 얘기해 줘요.

무관심한, 그러나 잿빛의 눈동자가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기린은 자신의 앞발을 내 손 위에 포개더니, 천천히,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기린이 된 인물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때로 새벽의 전철에 지친 몸을 실으면, 그래서 나는 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밀지 마, 그만 밀라니까.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은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 열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기린은 계속 생겨난다. 자본주의 속에서, 당겨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밀어낼 뿐이지.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이타적이기 힘들다. 현실은 대게 이상과 달라 슬프다.


그래도 한 가지, 부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란 것이다. 부는 창출되는 것이며, 모두가 부유해질 수 있다. 현재 동굴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수천수만 년 전 인류는 동굴을 차지할 정도면, 강한 권력이 있거나 부유했을 것이다. 중세 유럽의 귀족은 온갖 사치를 누렸다지만, 그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것은 '색이 있는 유리잔'이었다. 마트에 가면 흔히 보이는 것 말이다. 시대가 지날수록, 부는 창출된다. '빈'과 '부'의 격차 같은 건 사실 상대적이며, 절대적 측면에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우리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 줄 것은 분명하다.


결국엔, '빈익빈'은 짧은 기간 안에서만 통용되는 언어이지 백 년 단위로 살피면, 틀린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런 해결책이 없으므로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모르겠다. '연산의 답'처럼 답이라도 알려주면 좋을 텐데, '세상의 답'이란 당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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