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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은 죄가 없다

애호박 찌개



애호박 찌개


돼지고기 앞다리살은 기름을 깨끗이 정리한 후 숨덩숨덩 자른다.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1:1 비율로 넣고 국간장, 참기름 조금씩 넣어 주물 주물 해서 냄비에 볶아준다.

(이때 너무 가열된 냄비는 고기가 눌어붙으니 미리 예열하지 않는 게 좋다)


고기 표면만 익었다 싶을 때 다시마물(  찬물에 다시마 넣고 1시간쯤 냉침해둔 물)을 고기가  잠길 정도만 붓고 바글바글 끓인다. (고기를 너무 오래 볶으면 탄력이 사라져서 푸석해진다.)


고기가 거의 다 익었을 때 애호박 아주 많이 굵게 채 썰은 것, 양파 조금, 느타리 버선 많이, 다진 마늘을 넣고 한두 번 끓어오르면 대파 썰어 올리고 숨 죽으면 불을 끈다.


그렇게 한 김 식으면 새우젓 조금 넣어 취향껏 간을 한다. 새우젓이 없으면 천일염과 참치액젓을 조금씩 넣어 간을 한다.


추운 아침에 따끈한 국물과 면역력 증강에 좋은 애호박을 든든히 먹이니 맘이 놓인다.




어릴 때 내가 유일하게 먹지 않던 음식이 두 가지 있다. 국물에 빠진 오징어이고 (먹고 심하게 체한 적이 있다) 또 한 가지는 바로 호박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방학이 되면 나와 여동생은 안동 외갓집에 보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조르륵 낳은 3남매를 방학 동안 케어하시기 벅차셨던 것 같다. 셋이서 어지간히도 투닥거리고 샘을 부리고 했었으니까 말이다. 마침 결혼하지 않은 이모가 둘이나 있어 우리 자매는 외갓집에 가면 공주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안동은 시골이 아니었다. 낙동강 물이 범람해서 마을을 집어삼킨 후에 새롭게 정비하여, 근사한 2층 양옥집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양조장을 하셔서 그 마을에선 꽤나 넉넉한 집으로 소문이 났더랬다. 방학 때 가면 온 마을 사람들이 양조장집 손녀들이 서울에서 왔다는 소문이 나 맛있는 것도 많이 챙겨주셨고, 특히 내 또래 아이들은 신기하게 우리를 바라보며 서울을 궁금해하였다. 그러면 난 신이 나서 내가 사는 서울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이게 되풀이되니 자연스럽게 과자나 눈깔사탕을 가져와 새침데기 서울 친구와 친해지려고 하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되는데... 철없던 꼬꼬마 시절의 이야기다.)

어느 날. 낡은 스웨터에 머리를 빡빡 밀은 한 아이가 무언가 내밀었다. 둥글고 뚱뚱하게 생긴 무언가였다.

그리고 쪽지도 있었다.

'이건 호박인데 지짐도 해 먹고 국도 해 먹고 볶아서도 먹을 수 있다. 참말로 맛있어.'


이모는 그날 그 호박으로 맛있는 지짐을 해주었다.

개학이 다가와 서울로 갈 준비를 하는데 우리에게 호박을 준 그 아이가 다시 와서 또다시 쪽지를 주었다. 이건 또 뭐지? 펼쳐보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쓰여있었다.


'호박을 먹었으니 넌 못생겨질 거다. 원래 호박을 먹으면 호박같이 된다. '


그 호박을 괜히 먹었다고 억울하고 분해서 울었다. 내 동생도 덩달아 나를 따라 우느라 서울행 비둘기호 안은 울음바다가 되고-. 그날 이후 절대 호박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어른이 된 후에야 기다랗게 생긴 호박을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그런 말을 믿을까. 정말 순진하고 바보스러웠다. 그 아이는 신발에 흙 묻을까 뛰지도 못하는 서울 계집아이가 얄미웠던 모양이다.


여름방학 한 달, 겨울방학 두 달. 이렇게 석 달을 호기심 천국으로 살 수 있었던 게 커다란 추억이다. 지금의 나는 흙 묻을까 하는 걱정 따위는 없고, 맨손으로 땅도 파낼 수 있는 용감한 서울 아줌마가 됐다. 그리고 호박을 많이 먹어도 미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그럭저럭 밉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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