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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찜쪄먹던 시절이 있었다

소고기 야채말이 찜



소고기 야채말이 찜


어제 밤.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없다.

늦은 밤 콸콸 물소리 내며 쌀을 씻는것도 귀찮았다. 냉동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문을 열때마다 내 발등을 찍어대던 불고기감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소고기 한 덩이를 냉장실에 옮겨 두고 잤다.


잘 해동된 소고기를 쫙 펴준다. 피면서 키친타올로 반듯하고 얇게 눌러준다. 야채박스를 뒤적뒤적하여 팽이버섯과 부추를 꺼낸다.


소고기에 팽이버섯과 부추를 듬뿍 넣어 김밥 말듯이 돌돌돌 탄탄하게 감아준다.

끓는 찜기에 올려 찌다 고기표면의 색이 변하면 뚜껑을 덮어서 잔열로 익혀준다. 고온에서 오래 찌면 고기가 퍽퍽해져 맛이 없다.


맛간장에 유자청을 섞거나 레몬즙, 꿀, 후추 조금 섞어서 찍어 먹는다. 야채는 남아있는 야채들 어느것이든 좋다. 가끔 파프리카나 고추도 사용한다.


밥 없어도 든든한 한 끼.




잠시 반지를 빼고 핸드크림을 바른다고 생각했는데, 크림을 듬뿍 묻혀 손등을 한참 부벼대다 무심코 보니 손가락에 그대로 남아있는 반지. 그리고 덩그마니 놓여 있는 나의 안경.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집 현관문의 비밀번호는 8자리. 얼마 전에 갑자기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는거다. 8자리인건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생각이 안났다. 3분정도 이번호 저번호 눌러보다가 번뜩 8자리 조합의 규칙이 기억났다. 그렇게 3분만에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집 정리를 하다 보면, 집안 곳곳에서 보물찾기 하듯 기억에도 없는 물건들이 발견된다. 그 물건을 내가 왜 그 장소에 두었는지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잘 보관한다는게, 그렇게 넣어두고 필요할땐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또 사고, 사고, 그걸 또 보관하고, 보관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집엔 건전지가 말도 못하게 많고 냉동실에 보관된 고기덩이들도 많다.


인터넷 각종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id 와 패스워드들도 나를 괴롭게 한다. 누군가 말하길 그런걸 모두 같은걸 사용하면 위험하니 다르게 정해놓고 사용하라 하여 전부 다르게 설정하는 바람에 나의 기억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숫자들과 알파벳, 기호들이 생성되고 말았다.


어느날 안되겠다 싶어 코0트코에 가 빨간색 가정용 금고를 샀다. 남들은 금고에 보석과 통장을 보관한다는데, 난 그 곳에  각종 아이디와 비밀번호들 그리고 오만가지 비밀스런 것들을 몽땅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그런데 비밀번호 자릿수가 늘었다.

무려 12자리.


8자리 현관문 번호도 가끔 깜빡하는데 12자리를 무슨수로 외우나 .

 나름 규칙을 정해 숫자를 만들어서 외웠다. 초등학교 2학년 구구단 외우기 이후에 숫자를 외워보기는 처음이었다. 드디어 요즘은 금고의 비밀번호가 가끔 생각이 안 난다.

숫자가 생각나지 않는다기보다는, 어떤 규칙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니, 친구는

자기 머리위에 안경을 올리곤 한나절 안경 찾느라 울며 헤맸다는 이야기로 나를 위로했다.


한때는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아서 자판기라고 불려질 때가 있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회사의 부서별 전화번호라든가 노래방 노래번호, 가정용 전화번호부의 각종 번호들,  집안 친척들의 생일 등등을 외우는 건  내게 자판기를 찜쪄먹는 일이었다. 누가 언제 물어봐도 그 많은 숫자들이 탁탁 나왔으니까.


그런데 반세기 넘게 살다보니 업은 아이 3년 찾는 상황이 나에게도 스멀스멀 닥치는걸 보며 세월앞에 장사없다는 말이 실감된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순 없으니 이래 저래 여러 노력을 해본다.


얼마 전부터  구구단을 9단부터 거꾸로 외우기 시작했다.

예전만큼 빠른 속도로 외우진 못하지만,

기억은 난다.

서글프면서도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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