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술을 마시는건지 책을 마시는건지
금요일인데 약속은 없고,
후덥지근한 자취방에 일찍 가긴 아쉽고,
술을 가볍게 한 잔 하고 싶은데, 시끄러운 곳은 싫고.
신나게 놀기에 가까운 '불금'은 옛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마치 신이 세상을 다 만들고
일곱번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정해 쉬듯이, 금요일 저녁은 주5일을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해 주는 안식 시간이다.
눈독만 들이던 연희동 <책바>가 생각나 바로 달려갔다.
책바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책에서 나온 술을 직접 메뉴로 만들어내는 컨셉은 오래전부터 소식을 접해서 알고있었는데, 실제로 내가 그 감흥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을 들어가 건물 사이 작게 위치한 책바에서는
마치 도서관인것마냥 사람들은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고르고 있었다.
소음이라고는 말하긴 좀 그렇고,
잘 들리는 소리가 하나 있다면
가끔 사장님이 칵테일에 올릴 애플민트의 향을 더 잘나게 하기 위해 양 손을 오므려 탁탁 치는 소리 정도.
조도는 전체적으로 낮았고, 그 가운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Bar에 앉은 사람들에게는 미니 스탠드로 자리에 불을 밝혀주었다. 운 좋게 딱 한자리가 남았고, 다리 길이가 긴 바 의자에 촌스럽게 간신히 앉았다.
작은 스탠드를 켜면,
바에서 나만의 시간은 시작된다.
때마침 책바의 시그니처 칵테일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시즌 한정으로 선보이고 있었다.
무라카미하루키 책속에 나온 100% 서로를 알아봤을 때의 감정을 표현한 아주 상큼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었다. 아이스크림 메뉴의 배경이 된 책을 읽으면서 봐야 그 맛과 기분이 더 실감날 것 같아서, 그의 책을 골랐 단숨에 읽었다.
아이스크림 맛도 최고였다.
상큼한 맛이 정말 '아! 이사람이다!
운명적인 상대를 처음 만난 것 같은' 느낌처럼 짜릿했다.
그렇다고 눈을 못 뜰 정도로 신 것은 아니었지만,
오렌지와 파인애플의 맛이 서걱거리며 입안 가득 부서지는게 좋았고, 그 와중에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쌉싸름한 맛이 스쳤다.
마치 이 문장처럼.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의 여자아이란 말이다. 그는 내게 있어서 100%의 남자아이야. 그러나 그들의 기억의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 틈으로 사라지고 만다."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정말 입에 상큼달콤하게 확 붙었다가 화르르 하고 사라져버리는 맛이 아이스크림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아이스크림만으로는 아쉬워 하이볼을 시키고 책을 읽으니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냅킨에 적힌 문구마냥 정말 술술 책이 잘 읽혔다.
목 넘김도 좋고,
책 넘김도 좋고.
메뉴판을 10분 이상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메뉴판 한 장을 넘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카테고리를 나눈 것부터, 메뉴에 얽힌 책 이야기, 그리고 와이파이 비밀번호까지.
20도 이상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은 '시' 카테고리
20도 미만 알코올 도수가 적당한 술은 '에세이' 카테고리
10도 미만 도수의 낮은 술은 '소설'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책바에서 자체 제작한 칵테일 라인의 이름은
‘독립 출판'이었다.
메뉴 하나하나 책에서 발췌한 맛과
구절들을 담아놨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메뉴를 고르기 위한 메뉴판이기 보다
메뉴를 읽기 위한 메뉴판에 가까웠다.
그래서 좀 더 메뉴를 고르는데 신중해지고,
무엇이 맛있을까? 보다는
책 속 분위기를 잘 살려가며 어떤 메뉴를 마실 수 있을까?
어떤 술이 나를 책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줄까? 하는
상상이 가미된 질문을 던지며 고를 수 밖에 없었다.
혼자서 책을 읽고 가는 사람도 많지만,
따로여도 같이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책바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끼리
얘기를 나누지는 않지만,마치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것처럼 <책바>라는 이름 아래 자연스레 글을 나눈다.
약간의 보증금만 내면 책을 빌려 읽을 수도 있고,
나누고 싶은 구절은 포스트잇에 적어서 벽면에 붙일 수 있다. 때로는 책바 백일장이 열려서 같은 책 이름 아래 사람들의 글이 실리기도 하고,
이렇게 타인의 토막글을 읽으면서 감동할 수 있다.
동시에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자극도 받는다.
벽 한쪽에 매 달 새로운 주제에 따라 손님들은 자유롭게 짧은 글을 쓸 수 있고, 손님들의 투표를 반영해 주인장이 선정한 글과 당선작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다.
그 중 당선작 세 작품은 책바에서 술 한 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이번 달 주제는 '장마'라 그런지
다들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코로나까지 더해져 눅눅해진 마음들을 표현한 글들이 많았다.
술 기운을 빌어 나도 몇 자 적었는데, 다시 읽게 된다면
이불을 발로 걷어차겠지.
3시간이 훌쩍 지난줄도 모르고 책바에서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어른들은 혼자 분위기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약간의 술, 적당한 어두움도, 약간의 무드와 함께.
혹은 어린 아이처럼 무언가에 푹 빠져 웃거나 울거나 감정 그대로 즐기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는 딱 그 모든게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하루키의 문장이, 조금 쓴 하이볼이,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재즈가 그랬다.
엄밀히 말하면 책바를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들이
책을 마시는 경험에 최적화 되어있었다.
괜시리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호텔 라운지에서 얼음 넣은 위스키를 먹는 그런 풍경들이 어른들의 세계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책바에서의 풍경이 나는 훨씬 더 어른스럽고 멋지게 보인다.
알콜을 즐기는데 지적으로 즐기는 시간은 쿨하다.
미뤄둔 독서를 잠깐이나마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셔도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아서
더 좋은걸지도 모르겠다.
채울건 채우고 비울건 비워내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는 내 자신이 맘에 들었다.
내가 가끔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방해받지 않고 어른이 되는 시간이 필요할 때
책바를 또 찾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