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명의 작가 인터뷰를 읽고나니 내 글이 형편없어 보여서 쓴 글
시사 주간지 <한겨레 21>이 일냈다.
무려 스물 한명의 작가를 만나
인터뷰 기사로 특집호를 내버렸다.
사실 시사나 경제 관련 잡지는 관심이 없는데,
딱 한번 정기 구독해서 본 적이 있다.
수시 논술로 대학을 가겠다며 열심일 때
아빠가 한겨레 21 구독권을 끊어주신 거다.
그 때는 정말 재미가 없었다.
내가 관심 있어서 본 영역도 아니고,
그저 입시를 위해 논리적인 글을 쓰기 위해 문단을 나누는 연습을 하고 소주제를 뽑는 훈련을 하고,
겸사겸사 찬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세상 돌아 가는 일을 기사로 읽었다.
아빠 눈엔 딸이 이 시사지의 관점을 빌어
세상을 해석하길 바라셨던 걸 수도 있다.
무쪼록 대학에 가고나서
한겨레21은 매일 아침 배달온 신문지 사이에 끼여
폐지로 전락해버리고 구독을 끊어벼렸다.
지금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
거리가 더 가까워진 나지만,
이번 만큼은 한겨레 21을 사야겠다 마음먹었다.
거의 10년만에 다시 만난 한겨레21인거다.
커버에 굵고 선명하게 박힌 이들의 이름을 본 순간,
“이건 사야돼" 하는 마음이 번쩍 들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집을 읽으며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들을 찾는 시간을 좋아하기도 하고.
처음 보는 이름도 많았지만,
시사지에서 이런 기획을 했다는 자체가 참신했고
유래없는 일인것 같아서
소장하기에도 가치가 있어보였다. (와 4일 전 한겨레21 인스타 피드를 보니 판매량이 약 4배정도 뛰었다네..)
마지막 한 권을 가까스로 손에 쥔 발걸음이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마냥 너무 신이 나고 가벼웠다.
집에 돌아가 편집장의 레터로 이번 호를 준비하며 느낀 소감과 기획의도를 찬찬히 읽었다.
매번 정치,경제,사회 분야만 취재해온 기자들이
시, 소설을 쓰는 작가를 인터뷰한다는건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잔뼈 굵은 베테랑 기자들이
‘처음'이라는 순간을 다시 만났을 때
사회초년생 기자 시절의 떨림을 다시 느끼며
인터뷰를 하고 글을 써내려 간 걸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떨렸다.
인터뷰를 위해
쉴새 없이 맡은 작가들의 책을 모조리 읽었을테니
이 얼마나 숨이 차.
가장 먼저 열어본 인터뷰 기사는 박연준 시인이다.
시 쓰기는 눈을 감아야 하는 키스 같은 것
그녀의 인터뷰를 읽으니
그녀의 산문 집을 읽는 것 같았고,
나는 그녀의 시보다 산문을 더 좋아하는데,
시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서 괜히 혼자 삐졌다. (?)
툭툭 던지는 듯한 문장들이 나랑 대화를 하는 듯 했다.
내가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봤던 문장들이 나오면 껄껄 웃으면서 반가워했다
그녀가 발레를 좋아하는데,
발레의 절제되면서도 유려한 동작이 그녀의 말과 글이랑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가는 박준 시인이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란 매력적인 책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어찌된 구석인지 손이 닿지 않았다.
사람들은 엄청 좋다고 읽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무 슬퍼지고 질질 짤까봐
겁이나서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인가 한번 보자 싶어서 읽었는데
답변 하나하나가 너무 멋있었다.
마치 첫 눈에 반했다고 해야할까.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인터뷰 기사지만 이렇게 책에서 발췌된 문장들이 많아서
작품을 간접 경험하기도 하고, 후벼파는 문장들이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지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박준 시인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습작을 시작해, 6년 동안 1천편 가까이 (p.65) 쓰면서 끊임 없이 글을 붙들고 썼다. 근데 그가 그렇게 글을 쓰고 시를 썼던 이유는 정말 행복해서였다.
좋은 시를 한 편 쓰고 나면 엄청 행복하거든요.
내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끊임없이 퇴고와 창작을 반복하는 일이 쉽지 만은 않을텐데,
이 한 문장으로 이 과정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는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박준 시인의 시집을 한 편 샀더랬다.
뭐랄까 이렇게 진한 인터뷰를 쭉 읽고 나니
너무 행복했다.
이런 작가들과 동시대에 살 수 있어 그들의 생각과 문장을 함께 호흡하며 나눌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한편으로는 이들처럼
좋아하지만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지속 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그것은 인터뷰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쓰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난 다음 그 희열을 맛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다.
아직 나는 글을 쓰는 힘이 부족하다.
그저 힘이 있다기 보다는 조금 의무감을 가지고 쓸 뿐이다.
나아지겠지, 문장이 나아지겠지.
생각을 좀 더 분명하게 쓸 수 있겠지.
문제는 이렇게 끼적이기만 하고 퇴고를 하지 않는다.
쏟아내는 일기일뿐,
퇴고를 하게 되면 내가 뱉은 생각을
다시 곱씹고 마주하는게 고통스러울 까봐 피할 뿐이다.
과연 퇴고 없는 글도 글이라고 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작가님들은 분명 초안은 거의 버리기 일쑤이고
퇴고,퇴고,퇴고, 또 퇴고를 거쳐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할텐데.
과연 나는 글다운 글을 언제쯤 쓸 수 있을까.
쓰레기라도 쓰자라는 말을
입에 습관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글쓰기'라는 때로는 신성해 보이는 영역을
내가 더럽히는 건 아닌지
괜히 ‘글쓰기’에게 미안해졌다.
좀 더 생각과 호흡을 가다듬고
쓰레기가 아닌 진짜 글다운 글,
아니 나다운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
결국 그건 쓰고 ,또 고치는
그 지루하면서도 섬세하면서도 유일한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