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사모님들만 듣는 음악이 아니야
처음으로 클래식 채널 라디오를 들을 때, <김미숙의 가정음악> 김미숙 배우가 나긋나긋 읊어준 멘트를 기억한다. 배경이 된다는 것, BGM이란 말은 어디에나 가져다 붙일 수 있지만 '배경음악'이란 단어만 들어도 이 서정적인 느낌을 전달 할 수 있는 장르는 클래식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클래식 음악과 내가 처음부터 친했던 건 아니다. 원래는 인디음악을 좋아해서, 매 해 열리는 페스티벌도 쫓아 다니고 대학생 때는 밴드 동아리에서 베이스를 둥둥거리며 다른 악기와 합을 맞추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가사가 있는 노래가 싫어졌다. 아무리 음량을 줄여도 시끄러웠다. 슬픈 가사는 슬픈대로 찌질했고, 밝은 가사는 너무 그들만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마음이 복잡할 때에는 가사에 방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클래식의 매력을 알게 된 건 2년 전이었다. 혼자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 북스테이 1인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운전을 못해서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숙소에 들어갈 수 밖에 없던 처지였다. 이미 저녁 밥은 일찍 먹었고, 할 게 없었다. 그 날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심심했다. 수많은 책 중에 하나를 골랐는데, 전혀 읽어본 적 없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었고, 심지어 <해변의 카프카>, <상실의 시대> 처럼 대중적이진 않은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였다.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와 클래식에 대해 나눈 인터뷰집인데, 인터뷰이도 인터뷰어도 처음 책으로 만난 사람들이라 독자인 나는 약간 낯을 가렸다. 그냥 읽으면 영 진도가 안나갈 것 같고, 책에 나온 곡을 찾아 들으면 훨씬 잘 읽힐 것 같아 스트리밍 앱에서 곡을 찾아 이어폰을 꼽고 들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책의 문장들이 날개가 달린 듯이, 그들이 나누는 말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악보 위 춤추는 음표들처럼 빠르게 활자가 읽혔다. 음악을 듣는 것인지 읽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생경한 경험이었다. 이 때 들었던 곡은 '브람스 교향곡 1번' 으로, 나에게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있어요?' 라고 누군가 물어볼 때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곡이다.
자기 전까지 책에 나온 곡을 듣고, 다음 날 아침에도 사장님이 틀어 놓으신 클래식 라디오를 들으며 조식을 먹었다. 그 때 들었던 라디오 채널이 <김미숙의 가정음악> 이었고, 갓 나온 감자 스프에 따끈한 프렌치 토스트, 그리고 커피 한 잔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이었다.
그렇게 클래식은 서울로 돌아와서도 매일 아침의 배경이 되었다.
클래식은 배경이 되어주는 것과 동시에, 온갖 소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힘이 있다.
종종 주말에 본가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에서 클래식 라디오를 틀고 엄마가 아침 상을 준비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빠는 약간 볼륨을 높여서 소파에서 TV로 뉴스를 보고 계셨다. 엄마는 TV 소리가 시끄럽다며 아빠의 TV 볼륨을 줄여달라고 하기 보다는 라디오의 소리를 키웠다. 소음을 줄이기 위해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소리를 높였다. 볼륨을 높여도 그녀에게 클래식은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었던거다. 나 역시 그렇다. 지하철의 안내 방송 조차 소음처럼 느껴질 때, 간혹 들리는 통화소리나 기침소리가 유독 거슬리는 날, 때로는 내 마음의 소리가 거슬릴 때에는 눈을 감고 볼륨을 높여 클래식의 선율에만 집중한다. 겹겹이 쌓아 올린 음들을 어떻게 작곡가들은 작곡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기교를 부리는 악기 소리를 들으면 하염없이 빠져들게 된다.
사람들이 클래식을 고상한 취미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제대로 파본 적은 없지만 클래식의 세계는 넓고 깊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지만 계속 들으면 어렵지 않고 알고 싶은 영역, 궁금한 세계다.
심신이 지쳐있을 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냥 들어도 괜찮다.
느려졌다 빨라졌다 휘몰아쳤다 잠잠해졌다 하는 선율에 그냥 마음을 털썩 내려놓고 듣기만 해도 마음이 한결 좋아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