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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Dec 10. 2020

기사님 제발요

내가 좋아하는 것만 붙잡으렵니다

밤 11시 30분. 야근을 끝낸 시간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막차도 끊기고 별수 없이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밤에 택시를 타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지만 타야 한다면 '빈차' 불이 켜진 택시를 타지 않는다. 앱으로 택시를 불러 약간의 안전이 보장된 것 같은 느낌을 택한다. 네다섯 번 배차를 시도한 끝에 겨우 성공했고, 안전벨트를 매며 무사히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 녹초가 된 몸을 뒤로 기댔다.



붐붐 탁 붐붐 탁 ~ YO 렛츠 기릿

기사님은 힙합을 크게 틀고 따라 부르시며 운전을 한다. 그래 아저씨가 졸음을 쫓기 위해 음악을 트신 걸 거야, 엄청 노래를 좋아하시나 보다 하고, 심드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뿔싸.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이 노래가 아이콘의 이별길이란 노래예요. 아이콘 몰라요 아이콘? 창모, 뭐 이런 애들도 몰라요? "

"네."

"에이 아가씨 몇 살이에요? 어떻게 창모를 몰라?"

"서른이요."

"에? 서른이라고? 50 아니여? 누나 아니여?"


일단 누나 아니냐고 농담으로 하신 말씀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으신 것 같았지만 참으로 쉬고 싶었다. 평소 같으면 기사님이 하시는 말씀 잘 듣고 몇 마디 주고받긴 하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지친 상태로 집에 가는 길이면 거의 말할 힘도 없지 않은가... 속으로는 '예, 저 인디음악이랑 클래식 좋아하는데요' 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기사님은 힙합도 모르고 랩도 모르고 아이돌도 모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이런 나를 힙하게 만들어 주고 싶으신 건지 노래를 바꿔가며 이것은 어떤 노래다, 이건 누가 부른 거다 하며 스토리를 줄줄 읊어주셨다.

대꾸를 안 할 순 없었다. '아 그렇군요~ 진짜 좋네요~ 오 한 번 들어볼게요~' 의미 없는 리액션을 이어나갔다.


좋은 음악을 추천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운전 중인데 음악을 재생하는 핸드폰이 아저씨 발 밑으로 떨어지지를 않나, 하늘은 멀쩡한데 와이퍼를 실수로 켜시지를 않나.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노랫소리는 여전히 컸고, 택시는 한강 다리 위에서 강바람처럼 쌩쌩 달렸다. 속도계와 재생목록 화면을 넘기는 아저씨를 번갈아 보는 내 눈알 굴러가는 속도도 바퀴 구르는 속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겨우 레이스를 마치고 집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좋은 음악을 잘 찾아 들으면서 살으라는 마지막 덕담을 끝으로 나는 반강제적 택시 음감회를 끝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힙합도, 아저씨의 운전도 탐탁지 않았는데, 자꾸 마음속에 기사님이 그냥 툭 뱉었던 말이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할 때도, 잠들기 전까지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니 세상이 흘러가는 걸 알고 살아야지. 이 시대에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 택시 기사님

세상이 흘러가는 걸 놓치면 안 되는 에디터란 직업을 가지고 있지 만서도, 가끔은 모르고 넘어가고 싶을 때가 많다. 보고 싶은 정보가 너무 많고, 갖고 싶은 물건들, 가보고 싶은 새로운 공간들도 매일 넘쳐난다. 그래서 때로는 영상을 스킵하듯이 물밀듯 유입되는 온갖 세상의 소식들을 건너뛰고 싶다. 내가 다 흡수할 수도 없거니와 다 가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좋은 문장이라 한들 마음속에 새기고 싶다가도 노트에 끄적여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린다. 새롭고 신기한 풍경이나 장면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아도, 두 번 다시 열지 않고 삭제하기 일쑤니까.


"내가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뭐가 좋은 건지 몰라." - 택시 기사님

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아저씨의 말속에 내게 결핍된 태도와 행동이 있었기에 자꾸 곱씹은 것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것들 중에서 숨은 진주처럼 진짜로 좋은 것을 골라내는 능력은 정말 필요하다.

'이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거 맞아? 나한테 좋은 거 맞아?'라고 되물을 줄 알아야 한다. 왜 좋은지 모르고,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쫓아하거나,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이유를 분명히 대지 못하고 넘기면, 그건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게 소유하고 싶은 물건이든, 음식이든, 정보든,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든.

정말 좋아한다면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들일 것이다.


어쩌면 아저씨는 좋아하는 음악을 손님들에게 알려주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아함을 증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에너지 넘치게 말하는 자신을 보면서, 좋아하는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이를 일하는 시간에 활용해서 일도 즐겁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많은 것들 중에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걸러내는 일.

나이를 먹으면서 비슷한 부류의 사람만 만나고, 취향이 확고해질수록, 우리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자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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