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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Dec 29. 2020

손편지의 힘

손으로 쓴 글씨가 우편함에서 반짝일 때

우편함에는 받는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종이들이 잔뜩 들어가 있다.

부동산 투자 광고, 아직도 나오는 게 신기한 동네 마트 카탈로그, 공과금 고지서 등.

언제부턴가 우편함은 마치 열지 않고 휴지통으로 가기 쉬운 것들로 가득한 '받은 메일함'과 다를 게 없다.


새삼 어렸을 때 비교적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우편함이 떠오른다. 20여 년 전 내가 초등학생 일 때에는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실을 붙여 겨울 방학이 되면 어떻게 주소를 알아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카드를 보내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빨간색 종이봉투라면 더욱 반가웠다. 나름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신경 썼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뭐랄까, 이제는 프린터로 인쇄된 활자나 디지털 화면만으로 안부를 묻는 게 싫었다. 친구 역시 SNS로 좋아요를 눌러 주면서 서로의 존재를 최소한으로 증명하고, 보이지 않는 아주 희미한 관계의 실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진짜 우리가 친구가 맞는지도 괜히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짜 안부를 묻고 있긴 한 걸까? 싶었다. 그래서 갑작스럽지만 연말이기도 하고 내가 직접 편지로 따뜻함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잊고 지냈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유난히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느라 고생했다며 다독이는 인사를 짧게나마 담고 싶었다.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도 덜 쑥스럽고 자연스러운 그런 날이 연말이니까.

동시에 우편함에서 발견한 손글씨의 설렘을 더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아날로그한 편지의 기억이라든 지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마음으로 12월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지지와 편지 봉투 세트를 사고,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프로젝트의 성격을 덧붙여 인스타그램으로 지인과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열어놓고 무료로 신청을 받았다. 그냥 편지로는 어딘지 모르게 아쉬워서 내가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인상 깊은 문장을 발췌해 마치 포춘 쿠키 속 문장처럼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처음은 순조롭게 쓰이는 듯했으나, 열 명을 넘어가면서 '내가 이걸 왜 쓴다고 했을까' 하고 약간의 괴로움이 몰려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눌 문장이 고갈되어 갈 쯤에는 한 사람의 문장을 고를 때 4~5권의 책을 뒤적이다 보니 한 시간을 넘긴 적도 많다. 나보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연배가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내가 뽑은 문장이 행여나 '가르치려 드네?' 같은 생각을 들게 하면면 어떡하지?, '편지 내용이 기대보다 실망을 안겨주면 어떡하지?' 등 온갖 걱정 때문에 몇 번이고 편지지를 구기고 다시 쓴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뱉은 말을 꼭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어떻게든 썼다.


편지를 다 쓰고 봉투에는 귀여운 스누피 스티커를 붙이고, 오른쪽 귀퉁이에는 개당 470원짜리 우표를 하나하나 물풀로 칠해 붙였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잘 받았다는 인사가 오기 시작했다. 빼곡하게 종이에 자필로 답장을 써준 분도 계시고, 신청을 했기에 편지를 받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우편함에 꽂힌 걸 보니 설레고 기뻤다는 반응도 있었다. 서툴지만 진심을 눌러 담아 쓴 편지를 좋게 봐준 사람들에게 참 고마웠다. 남을 위해 시작한 일이 결국에는 나에게 기쁨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을 나눌 줄 안다. 기회가 없었다기보다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방식들 때문에 놓치고 있던 마음들을 저 밑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었던 거다. 약간의 용기와 노력만 더하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 남에게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베풀고 행하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든지 열릴 수 있다.


이 마음을 잊지 않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연말 편지 쓰기를 계속해볼까 한다. 아직은 내 주변의 몇 명에게만 마음을 전할 수 있지만, 한 명이라도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인간미 덜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편지를 읽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동할 수 있게. 몇 글자를 써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웃음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편함에 설렘을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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