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으는 맛이 있어야 쓰는 맛도 납니다만
3월 30일은 세계 연필의 날이다.
1958년 3월 30일은 Hymen Lipman이란 사람이 고안한 지우개 달린 연필이 특허를 받은 날이며, 이 날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세계 연필의 날로 지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물에 대해 그다지 애정을 갖는 편은 아닌데, 유독 내가 좋아하고 즐겨 모으는 아이템이 있다. 바로 연필이다. 모으기 시작한 지는 3~4년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광적으로 모으기보다는 연필이 당기는 날이면 기분 전환 겸 사러가는 경우가 많다.
키보드나 핸드폰으로 쓰는 디지털 기록보다 손으로 직접 쓰는 기록을 좋아하는데, 그때 필요한 도구가 연필이다.
펜으로도 필기가 가능하나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질감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연필을 사용하는 전후로 행하는 행위는 마치 의식 같은데, 그런 과정을 천천히 즐기는 것도 좋아한다.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 돌린다. (때로는 커터칼로 직접 깎는다) - 뾰족히 새로 태어난 연필을 바라본다. - 가루들은 바로바로 털어서 버린다. - 다 쓰고 나서는 색깔별로 나만의 연필통에 정리한다.
점점 닳아서 짧아지는 연필을 보고 있으면, 그만큼 내가 이 연필로 많이 기록했구나 묘한 성취감을 느낀다.
나만의 원칙이 있다면 손으로 쥐지 못할 정도로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쓰지는 않고, 그래도 이게 어디에서 나온 연필인지는 분간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로고가 깎여 나가지 않는 수준으로만 길이를 유지한다.
연필을 좋아하는 다른 이유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연필을 모으다 보면 내가 시간을 붙잡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수많은 연필 공장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이렇게 연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필통 속에 하나씩 자리 잡아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왠지 판타지 소설 같고 연필의 시간 여행에 함께하는 기분이 든다.
조금 솔직한 마음을 보태자면, 무언가 모으는 취미를 가져보고는 싶은데 너무 고가의 물품은 별로 흥미가 없고, 아니 살만한 여유가 있지는 않고, 일상적으로 내가 자주 쓰면서도 가격에 큰 부담이 없는 선에서 연필은 나에게 딱이었던 거다.
연필을 전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브랜드를 꼽자면 BLACKWING을 들 수 있다.
이직 면접에서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당하게 블랙윙을 좋아한다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는 블랙윙이야말로 스토리의 힘이 강력한 브랜드기 때문이다.
쓸모를 위한 소비라고 100%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간직할 만한 재미난 이야기나 의미가 있다면, 내 작은 행복을 위한 소비의 관점에서는 용인하기로 했다. 블랙윙 에디션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야기들, 특히나 미국 자연이나 역사, 예술 관련 인물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블랙윙은 세상에서 없어질 뻔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Eberhad Faber Pencil 이란 회사에서 1930년대 만들어진 블랙윙. 미국의 작가 존 스타인벡, 톰과 제리, 벅스 버니나 루니 툰 캐릭터를 만든 척 존스 등이 사랑한 연필로 알려져 있는데, 회사 합병 이슈로 블랙윙을 만들어온 회사도 사라졌다.
ebay에는 블랙윙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자루에 $40에 팔리기도 했는데, 팔로미노라는 회사에서 2010년 이 연필을 복각해 다시 판매하기 시작했다.
(팔로미노의 모회사는 CalCedar로, 연필용 목재를 제조하는 업체임)
연필뿐만 아니라 타 브랜드와 콜라보해서 굿즈를 판매하기도 하고, 블랙윙 수익금의 일부는 청소년의 음악, 예술 교육에 쓰인다고 하니 여러모로 단순한 필기도구를 넘어 크리에이터를 위한 지지자가 아닐까 싶다.
2020년에는 비스듬했던 블랙윙 로고를 똑바로 세워 리뉴얼했는데, 블랙윙 초창기 로고를 비슷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기존에는 PALOMINO를 연필에 함께 표기하고 있었는데 2020년 새로운 로고를 연필에 적용하면서 과감하게 팔로미노 로고는 지우고 블랙윙 로고에 연필 별 고유 넘버만 남겼다.
1년에 4번 한정판 연필을 출시하는데, 각 모델에 적힌 넘버와 디자인은 문화적으로 상징적인 인물이나 이벤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립적인 비즈니스와 기업가 정신을 기념한 연필이다.
1912년 프랑스 엔지니어 Georges Claude는 세계 최초로 네온사인을 파리 바버샵에 설치했다. 작은 가게들은 네온으로 간판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도시, 시골, 책방, 커피샵 할 것 없이 널리 퍼져나갔다. 6이 의미하는 것은 네온 불빛에 고유한 색상을 부여하는 6개의 헬륨, 네온, 아르곤 등의 기체를 의미한다.
1920년 8월 18일은 미국에서 개정된 헌법 19조에서 여성 참정권이 처음으로 인정된 날이다.
XIX는 헌법 19조를 의미하고, 36개의 별은 헌법 수정에 찬성하는 주의 수를 의미한다. 당시 48개 주 중에 36개 주의 찬성을 얻어야 효력이 발생하는데, 35개 주가 찬성해 위기에 몰렸으나, Tenesse 테네스 주가 극적으로 찬성으로 돌아서서 개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법안이 통과된 이후로 흑인, 원주민, 아시안, 라틴계열 아메리칸 사람들은 기득권층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온 것으로도 알려지긴 했다. 깍지에 있는 흰 띠는 참정권 깃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인도 출신 아티스트, 인도의 대표 악기 시타르를 연주하는 라비 샹카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한 에디션이다. 라비 샹카는 알고 보니 가수 노라 존스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1966년 비틀스의 기타 연주자 조지 해리슨이 라비 샹카에게 시타 연주를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망설임 끝에 승낙하고 시타 연주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둘의 콜라보는 정통 인도 음악과 현대 문화가 만나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연필에 새겨진 무늬는 라비 샹카의 아이콘인 시타에서 영감을 얻었고, 패턴은 산스크리트어로 om [옴]에서 따왔다. om은 깨어있는 것, 꿈, 존재의 무의식적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와 연관된 음성학적 기호이기도 하다.
한정판 소장 욕구는 가끔 나에게 충동구매를 불러일으키지만, 그만큼 많이 기록해야겠다 다짐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스토리를 공부하는 값이라 생각하며 즐겁게 이 소비 행위를 유지하기로 했다. (적당히)
나의 작은 사치에 합리성을 더하는 것 같지만
출근 전 연필을 골라 가방에 챙기고, 기분에 따라 골라가며 일기를 쓰는 재미는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일상의 숨고르기이자 작은 자유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