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 Apr 06. 2021

산책의 쓸모

비가 내린 다음 날 걷기를 좋아한다.

미세먼지 수치가 높은 날이 계속된 끝에 내린 비는 단비 같았고, 덕분에 그다음 날은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과 탁 트인 시야를 즐기기 좋았다. 이럴 때에는 창문 너머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무조건 집에서 나와 광합성도 하고 맑은 공기를 마셔줘야겠다 싶었다. 마스크를 빼고 깊게 숨을 들이 마시면 더욱 좋겠지만.  


집 근처에 가까운 공원이 없어서 그나마 가까운 보라매 공원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버스를 타러 가는 곳도 지도 앱으로 찾아가며 걷는 게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고, 배차 간격도 좀 되서 갈까 말까도 고민했지만 공원에 도착하면 불평이 사그라들 것을 알기에 참고 갔다.

30분 만에 도착한 공원에는 봄비를 맞아 연둣빛 새 잎들이 올라오고 있었고, 비가 내려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벚꽃은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 꽃비가 되어 제 몸을 떨구고 있었다.


사람들이 걷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다 나비가 있으면 멈추고, 축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면 고개를 들어 그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나무 그늘 아래 쉬기도 하고, 꽃잎이 깔아놓은 분홍 길을 밟으며 걷고 있었다. 산책을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은 이름표를 옷핀으로 옷에 꽂은 체 옆 친구 손을 꼭 잡고 꽃과 강아지들을 구경했다.

햇빛 맞으며 가만히 자고 있는 오리가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벤치에 앉아 계신 한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거셨다.


"뭘 찍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오리가 자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머쓱하셨던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니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오리를 향해 초점을 맞추셨다.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던 벤치에서 어른의 보폭으로 한 2번만 걸어 나가면 닿을 거리에 하얀 오리와 거무스름한 오리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보지 못하셨나 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주변 풍경을 무심코 스치기보다 같은 곳을 1~2초는 더 응시하는 편이다.   

주변과 조금 다른 색깔을 하고 있다면 분명 다른 게 있다는 거고, 작은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럼 뜻밖의 동물을 만날 수도, 처음 보는 꽃을 만날 수도 있다. 나무에 걸린 푯말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다  집에 가서 이름을 검색하면 새로운 정보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는 게 좋다.

세상에 절대 사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왜 그럴까?' , '이 이름은 뜻이 뭘까?'라는 작은 질문에서 몰랐던 이야기를 알아가는 기쁨을 느낄 때 이건 거의 생동감, 충만함에 가깝다.


발견의 눈을 가지고 살다 보면, 뻔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상을 새롭게 느낄 수 있고 즐겁게 채울 수 있다. 그렇게 발견한 내용을 SNS에 종종 공유하는데, 이런 발견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런 게 있었냐며 신기해하는 친구들의 반응을 볼 때도 참 기쁘다.


한 4년 전에 도쿄를 갔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도심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면 아주 너른 공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잔디밭에 삼삼오오 사람들은 모여 있었고  꽃나무 사진을 찍거나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거나, 연세 지긋한 어르신은 홀로 앉아 풍경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서울에도 이런 한가로운 공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도쿄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때와 비슷한 심상을 보라매 공원에서 느꼈고, 서울에 공원이 없는 게 아니라 평일에 한가롭게 거닐 내 시간과 여유가 없었던 거다.



우리는 꼭 효율, 쓸모 같은 단어를 운운하며 생산성에만 주목해 왔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하게. 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일을 잠깐 쉬면서 스스로 배우고 있다.

오히려 시간을 느슨하게 써도 기분은 좋아지고, 되려 무언가를 많이 얻은 기분이다.

우리는 쓸모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며,

그저 주변에 널려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나누기 위해 사는 게 아닐까.


혜화동에 '어쩌다 산책'이란 책방에서 '무용하고 아름다운 산책'이란 표현이 인상 깊었는데,

오늘의 산책이 정말 딱 무용하고 아름다운 산책이었다.

동시에 나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인만큼 쓸모가 있는 산책이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주어진 풍경을 잘 담아야지. 그리고 만끽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의 기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