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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Jan 07. 2024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노년의 삶이었다

'죽음'이란 두 글자를 떠올리면 무섭다.

예전에는 사후세계를 상상하면 공포에 가까웠다. 눈을 감고 숨을 한번 꾹 참아보기도 했다. 깨지 않을 긴 잠에 빠지는 것이 죽음이려나. 따지고 보면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의식이 없기 때문에 죽으면 끝인 게 맞는데 신체적인 기능이 멈출 때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어서 불안했던 모양이다.


태어날 때를 상상해 보면, 우린 엄마의 몸속에서 나왔을 때 기억이 없다.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와 응애~하고 울면서 '와, 양수가 없는 메마른 공기는 이런 거구나!' 하고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의식이 없었다가 생기는 것과, 의식이 있고 생의 끝이 존재하는 걸 아는 상태에서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건 정말 다르긴 하겠다만.


정확하게 어떤 게 두려운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어떤 대화 중에 죽음이 두렵다 했더니 상대가 이렇게 물었다.


 정확히 죽음의 어떤 게 두려운 거예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앞에서 언급했던 사후세계나 어떤 신체적 고통이 아닌 다른 두려움을 요즘에 더 많이 느끼는구나 싶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노년의 내가 어떤 삶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더 많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린 내일 아침에 죽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건강하게 무탈히 하루하루를 보내서 80이 되고 90이 되었을 때를 가만히 떠올려본다. 



1928년생 할머니를 보면서 노년의 삶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일단 주변에 친구가 없다. 말할 사람이 없다. 자식이 부양하고 있는 할머니는 복이 많으신 걸지도 모르겠다. 노인정에 같이 잘 다니던 누가 죽었다더라, 누가 요양원에 들어갔다더라.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신다. 때가 되어 주변 사람들이 생을 마감한다는 느낌은 어떤 걸까. 



말할 기회가 줄어드니 언어적 능력도 자연스레 떨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고립감을 더 쉽게 느낀다. 보행보조기에 기대어 걸을 순 있지만 할머니는 치매 증상으로 혹여나 집을 찾지 못할까봐, 혹시나 본인이 실수를 할까봐 집에만 계신다. 집에서 할머니가 기다리는 건 딱 두 개. 누군가의 안부전화, 다른 하나는 나나 내 동생이다. 외롭다는 건 그런 감각인 걸까. 



신체적 능력도 떨어지니 도통 밥을 차려 먹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본가에 갔을 때 수북이 쌓인 컵라면 용기를 보며 혼자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몇 남지 않은 대여섯 개의 이로 할머니는 밥을 삼킨다.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한다. 가족끼리 밥을 먹을 때에도 부드러운 살코기를 발라드리거나, 아주 잘게 잘라서 드린다. 김치도 빳빳한 부위보다 배추의 아주 여린 쭉정이만 찢어서 드린다. 



취미가 없으면 노년의 삶은 더욱 무료해진다. 할머니는 취미가 없다.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소리 없이 TV를 보거나 잠들어 있다가 밥을 먹고 약을 챙겨 먹는다. 그게 전부다. 심심할 할머니가 걱정되어 몇 번 컬러링 북을 사다 드렸다. 나에게 보여주겠다고 열심히 색을 채워놓으셨는데. 이제는 색연필을 손에 쥐고 칠하는 것 자체도 팔에 힘이 들어가서 하지 않으신다. 



할머니는 하루하루 죽을 날을 기다린다. '빨리 나를 데려가면 좋겠다'고,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거짓말 같다. 할머니는 살고 싶다. 살고 싶어 한다. 약만큼은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드신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고기반찬이라도 올라오는 날엔 야무지게 밥 한 그릇도 뚝딱 비우신다. 우리가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할머니는 입이 트인다. 수다쟁이가 된다. 할머니의 일상엔 새로운 게 없기 때문에 늘 4,50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하신다. 문방구 장사를 한 이야기, 본인이 어렸을 때 딸기밭 서리를 한 이야기까지. 



모든 할머니의 하루가 그렇게 흘러가진 않겠지만, 90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은 요양원에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이 많거나, 아님 나의 할머니처럼 혼자 남겨진 집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 오더라도 더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게 나의 바람인가 보다.

살아가는 동안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하면서.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기를. 인간으로서 내가 쓸모가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를.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기를. 계절의 냄새를 흠뻑 맡기를.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치면서 재미를 찾기를. 거창하지는 않지만 맛있는 한 끼를 잘 차려먹기를. 죽기 전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몇 글자를 적어 나의 기록을 남기기를. 누군가 내 몸을 씻기고 나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기간이 무척이나 잠깐이기를. 나의 마지막 쉼터가 요양원이 아니기를. 



나의 마지막을 보내는 곳이 나의 포근한 집이기를. 

마지막까지 잘 살다 간다고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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