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조차 설득 못 시키는데 남은 어떻게 설득할래?

정신승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이유

by 곽명의 프리즘

'정신승리'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어떤 감정이 드는가? 보통은 패배자의 변명이나 구차한 핑곗거리라고 여긴다. 나 역시 예전에는 "사람이라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지, 자기 세계로 도망치는가"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곤 했다.


그러나 뇌과학과 진화심리학, 그리고 소위 성공했다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내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정신승리'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그 건조하고 현실적인 이유를 서술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진실을 위해 진화하지 않았다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인간은 '진실'을 추구하도록 진화했을까, 아니면 '생존'을 추구하도록 진화했을까? 답은 명백히 후자다. 일단 살아남아야 진실을 탐구하든 다른 일을 하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는 섬뜩한 통찰을 제시한다. "인간은 타인을 더 완벽하게 설득하기 위해,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도록 진화했다."


생각해 보자.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까? 투자자 앞에서 "이게 정말 좋은 사업 아이템인 것 같기도 한데요..."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지갑을 열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내 생각을 '진실'이라고 100% 착각하고 확신해야 눈빛이 흔들리지 않고, 그 에너지가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상대방 역시 진실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좇는 인간이다. 당장은 근거가 빈약해도, 상대의 확신에 찬 모습을 보고 '저기에 배팅해야 내가 산다'고 판단한다. 즉, 인간은 진실보다는 자기 확신, 어쩌면 '착각'을 무기로 생존해 온 종(species)이다.




착각은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뛰어난 생존 전략


이 '생존을 위한 착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예시가 있다. 남녀 관계에서의 심리를 살펴보자.


마음에 드는 이성과 눈이 마주치거나 연락이 조금만 빨라져도, 우리는 "나에게 관심이 있나?"라는 기대감을 품는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오류 관리 이론(Error Management Theory)'이라고 부른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이것은 꽤 남는 장사다.


만약 착각해서 접근했다가 거절당하면? 한순간의 망신으로 끝날뿐이다. 하지만 상대가 진짜 신호를 보냈음에도 "설마 나 같은 사람을..."이라며 겸손을 떨다가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될까? 번식의 기회가 영영 사라진다. 유전자 전달의 실패는 진화적으로 곧 '멸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뇌에는 일종의 '도끼병 필터'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생존 확률을 높이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CEO들은 모두 프로 '정신승리러'였다


재밌는 점은, 이 '착각하는 본능'을 극대화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세계 최고의 CEO들이라는 사실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묘사할 때 늘 따라다니는 단어는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었다. 자기 확신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마감 기한조차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믿어버렸다. 본인이 먼저 그 환상에 완전히 몰입하니, 직원들 역시 홀린 듯이 불가능한 마감 기한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테슬라와 스페이스 X를 가진 일론 머스크는 2008년 파산 위기에도 "우리는 화성에 갈 것"이라며 전 재산을 쏟아부었고 지금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있다. 오픈 AI의 창립자 샘 알트만은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망상에 가까운 확신으로 챗GPT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사기꾼이 아니다. 트리버스가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완벽하게 설득해 낸 사람들이다. 그 거대한 '정신승리'가 결국 현실을 압도하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객관적인 현실은 우울할 뿐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충격적인 반전이 존재한다. 과연 '객관적인 것'이 항상 긍정적일까?


심리학의 '우울한 실재론(Depressive Realism)'에 따르면,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일반인보다 세상을 훨씬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한다. 반면에 소위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과 미래를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미한 나르시시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건강한 정신'은 사실 '적당한 망상' 상태를 의미한다. 너무 냉정하게 현실만 직시해서는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정신승리, 좀 해도 괜찮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버티는 힘은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내가 정신승리를 권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세상의 보상 시스템은 비선형적이기 때문이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1만큼 노력하면 1만큼의 보상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 '죽음의 구간'이 반드시 존재한다. 성과 없는 J커브의 밑바닥을 아주 오랫동안 견뎌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 구간에서 포기한다.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가망이 없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승리를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이것은 훗날 전설이 될 과정이다"라는 비합리적인 자기 암시로 그 시간을 버텨낸다.


결국 그 임계점을 넘어 폭발적인 보상을 쟁취하는 것은 차가운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안의 확신을 믿고 끝까지 밀어붙인 '뜨거운 낙관주의자'들이다.




정신승리가 '현실승리'의 원동력


이제 정신승리가 정말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그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우리를 우울함에서 지켜주는 방패이자 결과를 현실화하기 위한 강력한 엔진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정신승리 좀 그만하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핀잔을 준다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자.


'당신은 당장 보이는 현실에서 멈추겠지만, 나는 내 착각을 현실로 만들러 간다.'


나조차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데, 세상이 어떻게 나를 믿어주겠는가. 그러니 조금은 뻔뻔하게 믿어도 된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말로, 모든 성취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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