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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우 Jan 05. 2018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뒤에서 두번째 주자처럼

2017년 썸이 끝나고


 이번년도 썸 활동을 마무리했다. 기울고 비틀거리는 날들 사이에 우뚝 선 단 하루만큼의 시간. 난 오직 수요일 하루만 두발로 걸어다닌 사람이 되었던 느낌이다.


 썸은 내가 말하고 글쓴 곳이다. 2학년 생활 중에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곳도, 글쓸 수 있었던 곳도 썸뿐이었다. 나는 얼마간의 실수로 다른 곳에서 말을 잃어야 했고, 게으른 성격에 글을 잘 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내가 썸에서만큼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글을 쓰려고 머리를 싸맸다. 또 연필로 휘갈겨 쓴 그 글을 진지하게 읽으려고 분위기도 잡았더랜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말할 때와 글쓸 때라는 걸 생각했을 때 썸이 일년동안 내게 얼마나 큰 의미었는지는 재지 않아도 충분히 와닿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내 친구들을 보아도 썸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 영혼을 두드렸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내가 반강제로 썸에 욱여넣은 우재는 자기가 쓴 글을 읽을 때마다 잔뜩 긴장해서 로봇같은 톤으로 한글자 한글자 힘주어 읽어 총회 때마다 우리를 웃게 했다. 자기는 그 부끄러움이 싫다고, 나에게도 툴툴대었던 우재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다. 그랬던 우재가 소풍갔던 날 시를 써서 읽었는데, 그랬던 우재가, 누구 하나를 울렸댄다. 나는 소풍을 안 갔어서 잘 모르겠지만 2학기 때도 할머니에 대한 글을 써서 선배 한명의 눈시울을 붉혔던 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도 분명 그때 울컥했었다. 내가 회장이 되었다고 말하니 "제발 썸 좀 잘 부탁한다"고 농담으로 그놈이 해준 말은 언젠가 내가 힘들 때 큰 위로가 되겠지.


 여진이도 일년이라는 시간동안 나에게 느린 놀라움을 느끼게 했다. 1학기 땐 "이런 것도 답변이 될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자기가 쓴 글을 읽다가 얼렁뚱땅 말끝을 흐리던 여진이가, 2학기 땐 차분하고 또 발랄하게 답변을 적어 조금씩 조금씩 우리를 어지럽게 했다. 어느 날엔 부모님과 관련된 질문의 대답으로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올해가 돼서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며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 21년 킬로미터"라는 글을 써서 읽어주었는데, 난 그때 내가 썸 회장단을 하게 되면 꼭 여진이에게 같이 하자고 말해야겠다 다짐했었다.


  다들 그랬다. 내가 둔하고 무감각해서 일일이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썸에 녹아들어 있었다. "나는 질보단 양으로 승부하겠다"며 답변을 서너개씩 적어 놓고선 '덤벼 보시지'하는 표정으로 웃었던 혜민이, 랩 가사 쓰는 것마냥 라임에 펀치라인을 무심한 척 뽐내던 정수 녀석, 눈치 슬슬 보면서도 누구보다 솔직한 목소리로 글을 읽던 승현이, 질문 세개에 하나씩은 꼭 남자친구 얘기를 끼워 넣어서 모두에게 염장질한 은별이, 시종일관 시니컬한 표정으로 있다가 여행 얘기 할 때면 밝게 웃던 유정이, 매번 자기가 겪은 일들을 답변에 녹여내 내게 글은 경험에서 오는 거라고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정인이형, 내뱉은 글자보다 추임새가 더 많았던 유빈누나, 보기 힘들었지만 부끄러운척 하면서 할 말 다했던 수민누나 혜빈누나 민정누나, 바빠서 방학때 은퇴한 형누나들까지. 정도는 각자 다르겠지만 모두 우리 눈빛, 피부, 기억 한 구석이 썸으로 채워져 있다고, "우리 꽤 좋았어요."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여진이랑 썸 단톡방에 "여러분의 소중한 썸, 저희가 잘 지켜나가겠습니다!"라고 당차게 말했을 때 엄마 미소 지으면서 흐뭇해 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겠지.



 썸을 이끌게 되었다고 알렸을 때 주변에서 참 많은 조언을 받았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썸은 아무래도 회장단 색깔을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지."라는 말. 여진이와 그 말을 두고선 우리의 썸은 어떻게 될까, 혹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고민했다. 아직까진 간절하다거나 욕심이 생긴다거나, 애타는 감정이 생기진 않았지만 나도 분명 누군가에게 소중한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다며 방방 뛸 때가 오겠지.  그리고 막상 썸을 시작할 땐 우리 모두 의뭉스러움을 품고 쑥스럽게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며 설레서 밤잠 못 이룰 것이다. 난 그냥 안으로 굽으면 되지 않을까.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갈고 닦는다거나 그럴 거 같진 않다. 책 적당히 읽고 또 적당히 놀고 그럴 생각이다. 그냥 균형이나 잃지 않게 애쓸 생각이다. 그게 내가 잘하는 거니까. 어디가 끝인지도 모른 채, 그저 숨을 쉬고, 그저 발을 내딛으면서, 균형 잃지나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뒤에서 두번째 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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