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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우 Jan 25. 2018

너무 쓰고 또 짠 맛

책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읽고

조너선 사프란 포어, 민음사

 편지. 편지는 아름답다.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불리는 노래의 결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보드랍게 감싼다. 내가 썼던 수많은 텍스트 중 가장 예쁘고 놀라운 문장들 또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썼던 편지 안에서 태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청나게 두껍고 믿을 수 없게 부산스러운 이 책을 덮으니, 사십 년 동안 알지도 못하는 아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수없이 많은 편지를 적었던 그 노인의 마음이 내 마음을 웅웅 울리는 게 "한 번에 일 밀리미터씩" 느껴진다. 


 전쟁의 포화 속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던 키 큰 남자의 유전자는 세월이 흘러 전쟁의 아픔에 갇혀 살아남기 위해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가엾은 어린아이가 되었다. 이제 막 뜨거운 사랑을 시작한 청년과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거 같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믿을 수 없게 끔찍한 전쟁의 상처에 고통받는 것을 보며, 우린 전쟁이 아무 죄 없는 이들에게까지 아픈 흔적을 남겼음을 짐작한다. 내가 그들의 친구였다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해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다,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사랑하며, 그리워하며, 편지를 쓰며, 또 무언가를 발명하며 스스로 도울 뿐이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자꾸 아리게 한다.


 어린아이의 시선은 대개 충격적이다.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에 나오는 죄르지가 그러했고 이 소설에 나오는 오스카가 그러하다. 그것은 가장 직설적인 은유를 위한 작가의 선택이기도 하고, 어쩌면 진실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꾸짖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과연 이 소설에서 오스카가 보여주는 미망인의 삶은 내 숨통을 조일 정도로 아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소설의 "세입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마땅한 이유 하나 없이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고 아들을 모두 잃어야 했던 한 노인의 수심(愁心, 水深)은 대체 어떤 신이 정해놓은 걸까. 대체 어떤 상처가 한 사람의 언어를 잃게 하는 걸까 생각해본다. "누구나" 하는 사랑인데, 사랑을 잃고 상처를 입고 언어를 상실하는 사람은 왜 "아무나"이지 않은지도 질문해본다. 그러나 내가 그 아픔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상실의 크기, 아픔의 밀도가 내가 느껴보지도 못했던 것임을, 또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단단했음을 헤아린다. 


 "근원도 의미도 알 수 없는 얼굴 없는 폭력"의 기록들을 읽고 감상할 때마다 미움의 감정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그리고 폭력은 절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긴다. 뭔가 아픈 것 같으면서도 고통스럽진 않고, 가슴이 그러한데 정확히 어디가 그런 건진 모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내 몸 속에서 왕왕거린다. 우리는 왜 자꾸만 끊임없이 누군가를 미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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