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도 알 수 있는 것
"이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싶을 만큼 좋아하는 것이 있어요?"
책이 묻는다.
어떤 질문은 대답보다 중요하다. 질문은 대답을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이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게 분명해. 순간 번쩍 정신이 든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키가 잘 될 때 스키가 마지막 나의 비빌 언덕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만으로도 좋으니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 잠깐이나마 그런 넉넉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 넉넉한 마음이 들 때의 나를 나는 좋아한다. ” -<일하는 마음> 중에서, 제현주
JD샐린저는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작가에게 전화 걸고 싶어진다고 했다. 전화까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인데, 일과 상관없는 이런 질문까지 하는 걸로 봐서 작가는 일의 즐거움을 알지만 일만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더 파고들게 된다.
다행히도 떠오르는 것이 있다. 피아노가 잘 되던 어떤 순간. 누구도 본 적이 없고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나와 피아노만 아는 그 시간. 피아니스트가 될 수는 없어도 그 시간의 주인은 될 수 있다.
음악을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공연을 보는 것도 좋고, 오디오 시설이 좋은 LP바에서 함께 음악을 듣는 것도 좋다. 피아노 연주회도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서만 아는 것이 있듯이, 사람과 사물의 관계도 그렇다. 진짜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은 둘이 있을 때다.
연주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공할 것도 아닌데 그냥 피아노를 친다. 마음처럼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아 때로 좌절하지만, 그래도 쳐본다. 틀리는 곳에서 안 틀리려다가 또 틀리고 만다. 이번엔 안 틀렸다 싶으면 다른 부분에서 삐끗한다. 좀처럼 나이 지는 것이 없어 보이는 날이 있다. 반복을 즐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못하다. 한 번만 더. 그럼에도 한다. 반복에 또 반복. 연습하지 않고 해내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래도 다시 해볼 수 있다. 잘 안 되니까 그만두라는 규칙은 없다. 될 때까지 해볼 수 있다. 한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막는 사람은 없다. 내가 멈추기 전까지는. 다시 해볼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비결이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노래를 하고 손가락이 그 위를 따라간다. 그리고 노래가 완성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렷이 알 수 있는 그 순간들. 연주하기 전에는 몰랐던 전혀 다른 세상.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은 피아노 주변에서 벌어지는 비밀들을 잘 드러낸 책이다. 연주하는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물론 극소수의 독주자만이 정상에 이르러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 왜 그냥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연주하면 안 되는가?(중략)
물론 음악은 함께 나누는 멋진 것이 될 수도 있다. 연주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단 둘이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을, 그리고 작곡가를 깊은 곳에서부터 알아가는 순수한 기쁨을 위해 혼자서 연주한다는 생각을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 -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중에서
혹시 이런 것이었을까. 악보에 녹아있는 작곡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런다고 거장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무언가 더 볼 수도 있다.
쇼팽은 공개발표회를 싫어했으며, 연주회를 거의 하지 않았다. 굴렌 굴드는 한 때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전성기 때 돌연 무대에서 은퇴하고 레코딩 작업에 몰두한다. 무대의 매력은 한번 맛보면 벗어나기 힘든 것이라고들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더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아는 것은 피아노 우주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피아니스트들이란 연습에서 찾아온 완벽한 순간을 이어가는 사람들 일지 모른다. 우주 전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사이를 여행할 수는 있다. 고단한 여행길에 마주치는 뜻밖의 즐거움처럼, 혼자라서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세계. 그걸로 인해서 내가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순간이면 된다고 느껴지는 시간. 그 즐거움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