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은 나쁜 것을 필요로 한다
파리의 어느 과일가게에서 살구를 고르는 여인이 있다. 주인이 툴툴댄다. “이 값에 좋은 살구만을 골라서는 안됩니다. 나쁜 것도 함께 가지고 가세요.” 여인은 못 들은 척하고 살구를 담는다.
좋은 것을 골라야 한다는 강박을 피해 가기 어려운 시대다. 광고의 홍수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좋은 것만 사고 싶고, 또 산다고 해도 더 좋은 것을 바란다. 아무리 싼 값이라 해도 나쁜 것을 함께 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가게 주인의 심술이었던 걸까.
그때 옆에서 주걱으로 살구를 담던 남자가 갑자기 이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한 가지 문제에 골똘히 빠져있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답을 얻을 때가 있다. 그는 기록한다.
'이 날 내가 목격한, 그리고 내가 겪은 작은 사건이 잊히지 않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 세상의 모든 훌륭한 것들은 결점과 흠을 동반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느끼게 해 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창의력 컨설턴트이자 작가 에릭 메이슬의 책의 일부이다.
훌륭한 어떤 것을 볼 때는 결점을 떠올리기 어렵다. 그것은 결점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점이 흠을 압도하는 것에 가깝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업 과정을 보이는 것을 꺼린다. 사람들은 순간의 영감으로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천재는 대중들의 환상을 자극한다. 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바라보는 사이, 자신만 아는 시간을 통과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에 이런 장면이 있다. '피아노를 정복하다'는 헤드라인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혼자 연습을 하면서 말한다.
"이 부분이 잘 안 돼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옥타브로 치는 건데..."
그의 솔직한 모습에 놀란다. 무슨 곡이든 척척 연주해낼 것 같은 피아니스트라도 연습할 때는 다르지 않다. 보여줄 용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데뷔작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밴드들은 데뷔 앨범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 영국의 한 방송 진행자가 브릿팝을 이끈 밴드 블러(blur)의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의 데뷔 시절을 묻는 인터뷰를 한다.
'어떤 밴드들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데뷔를 한다. 그러다가 그 완벽함을 다시 따라잡기에 고전하기도 한다.(흔히 얘기하는 서포모어 징크스를 말하는 듯하다).'
이들 역시도 데뷔 앨범 <leisure>를 낼 때 어리고 미숙했고 레코드 마스터를 만족시키려고 집중했다고 회고한다.
'그건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나는 실수를 즐긴다고까지는 못 해도 실수에 대해서 열려있다. 지금도 나는 실수를 한다. 실수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 완벽하지 못한 채로 있어보는 것도 중요하다.'
완벽하지 못함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완벽함이라는 찬사에 가려진 베일을 슬쩍 들춰준다. 그의 인터뷰에는 남들이 잘하지 않는 얘기들이 있었다. 그는 공연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어색함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분명히 '오랜 기간'을 말했다. 처음부터 무대 매너가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은 스쿨밴드에서 오랫동안 그 어색함을 견뎌왔다. 그의 농담 같은 표현을 빌리면, 스쿨밴드를 하던 시절 '우리는 아침 9시부터 학교 강당에서 전교생들을 괴롭히는 공연을 했다'라고 했다.
그래미 록 베스트 퍼포먼스상을 받은 화이트 스트라입스(White Stripes)의 리더 잭 화이트(Jack White)는 기타 연주를 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타를 연주하는 것은 멋진 것은 아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가장 쑥스러운 일들 중의 하나였다. 화장을 하는 것처럼"
그의 무대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기 어렵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생각해 보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님에도 우리는 화려함에 가려진 세계를 간과한다. 보이는 것들에 의존하고 판단을 내리곤 한다. 결과만 보고 과정은 흘려버린다. 힘든 과정을 떠올리는 것으로 재능에 대한 신비감이나 환희를 희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얼마 전 본 SONY의 광고 카피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엔 완벽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만 집착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완벽함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만 거꾸로 그 때문에 무언가를 하지 못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저 정도로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라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좌절하기도 하고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려다가 정작 발도 떼지 못하기도 한다. 갈증은 사람을 목마르게도 하지만 지나친 갈망은 대상을 죽이기도 한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인데, 완벽함에 대한 집착이 실수에 대한 여유를 잠식하기도 한다. 실수를 오랫동안 되새기고 또 떠올리면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피겨 여왕 김연아의 장점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스케이팅 -그 유명한 트리플 액셀을 하다가 넘어졌을 때 재빨리 털고 일어나서 다음 동작을 바로 이어가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가 완벽한 공연을 망친다는 생각이 자리 잡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어쩌면 재능이라는 것은 실수를 어느 정도 잘 털고 일어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그 실수 자체를 확대 해석하지 말고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나아간다. 실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실수를 했을 때 주저앉는 편일까, 빨리 터는 편일까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결점과 흠을 동반한다. 좋은 것은 나쁜 것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