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중의 호텔은 마법의 성과 같다
자러 가기 싫은 날이 있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일정을 모두 마치고 가까운 방 사람들끼리 모였다. 바깥은 암흑. 낮에 훤히 보이던 바다마저 어둠에 묻힌다. 일에 쫓겨 못 나누었던 얘기들이 고개를 든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지나쳤다면 몰랐을 이야기들. 몰라도 상관없고 별것 아니지만, 달의 뒷면을 본 것도 같은 심정이 된다.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매일 달빛을 받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를 것도 같다. 아침이 되면 물거품처럼 다가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시간엔 잠들어있고 싶지 않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한 밤중의 호텔은 마법의 성과 같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고백과도 같은 중얼거림. 벤자민은 항해 도중 러시아의 어느 작은 호텔에 머문다. 잠이 오지 않아 로비에 내려갔다가 낯선 여인과 마주친다. 차 한 잔 권하며 어색하게 함께 하게 된 테이블. 설명이 더 필요 없다. 브래드 피트와 틸다 스윈튼이다. 동틀 때까지 대화가 이어지고, 각자의 방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매일 밤 자정이면 만나게 된다. '겨울 궁전'이라는 호텔의 이름처럼 눈 내리는 밤의 풍경은 작은 성처럼 보인다.
영화 속의 호텔이 근사했던 건 아니다. 뱃사람들이 드나드는 외딴 허름한 숙소. 계단도 삐걱거리고 문들은 낡았고 쥐들도 들락거린다. 심지어 차를 마시려 했을 때 꿀통엔 벌레도 빠져있다. 하지만 이 호텔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건, 어떤 정서가 그곳에 보였기 때문이다. 낯선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는 우연이 서려있고, 방해하는 이도 없다. 누군가는 편안히 잠들어있다. 도시가 잠드는 시간에도 남모르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
1970년. 뉴욕 첼시 호텔 1017호의 주인은 펑크록의 퀸 패티 스미스(Patti Smith)였다. 옅은 푸른색 방에 크림색 시트가 놓인 하얀 철제 침대, 세면대와 거울, 작은 수납장 그리고 빛바랜 깔개 위 소형 흑백 티브이가 전부인 이 호텔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다. 그녀는 기막힌 호텔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그곳으로 향한다. 잭슨 폴락, 딜런 토마스, 밥 딜런, 제니스 조플린 같은 당대 인사들이 모두 그곳에 거주했다. 첼시 호텔은 숙박비 대신 작가들의 작품을 사주는 독특한 운영 방식 때문에 예술가들의 성지가 되었다. 가난하여 숙박비를 감당할 수 없던 그들에게 낙원 같은 곳이었다. 복도를 걸으면 익숙한 이름들이 귀에 들려왔다. 옆방에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시가 쓰이고 있었다. '인간이 칠 수 없는 박자가 쓰인 말도 안 되는 악보'는 물론 마무리 짓지 못한 곡과 쓰다 만 시들도 굴러다녔다. 그들만의 전시회나 연주가 그때그때 열리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실험들이 벌어졌다. 패티 스미스는 서점에서 일하며 호텔비와 식비를 충당했다. 첼시 호텔은 그녀에게 숙소가 아니라 어떤 '태도'였다.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줄 게 있는 사람이라면, 첼시 호텔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장에 서 있는 것이니까.'
그녀의 책 <저스트 키즈>에는 막 첼시 호텔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놀라서 구경하긴 했지만, 위화감을 느끼진 았았다. 첼시 호텔은 내 집이고, 엘 키호테는 내 바였다. 보안요원도 없었고, 특권의식 같은 것도 없었다. 뮤지션들은 우드스톡 페스티벌 때문에 와 있었는데 워낙 호텔엔 뮤지션이 많아서 그런 줄도 몰랐다. 사실 나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뭔지 그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증락)
그날 밤 방으로 올라오면서 그 뮤지션들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유대감을 느꼈는데, 예감 같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당시엔 내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시 몇 편 때문에 끙끙대는, 스물두 살의 멀대 같은 서점 직원이었을 뿐이었다.'
1902년대. 뉴욕엔 이미 호텔의 전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앨곤퀸 호텔은 스콧 피츠제랄드, 윌리엄 포스터 같은 재즈시대 작가들이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도로시 파커는 그 호텔에서 글도 쓰고 평론가들과 토론을 즐겼다. '앨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원탁 모임이 밤마다 호텔의 불빛을 밝혔다. 거의 모든 글쓰기 분야에 뛰어났던 그녀는 영화 <스타 탄생>으로 아카데미 각본상까지 수상했다. 날카로운 사회의식으로 거침없는 독설과 비평도 서슴지 않았던 그녀의 아지트가 바로 이 호텔이었다. 그 테이블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고 1106호는 '파커 스위트'라는 이름의 시인의 방으로 남았다. 시인들의 로망이 되었다.
1920년대의 파리. 살롱문화가 한창일 때 미국에서 날아온 두 여성이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연극비평가였던 솔리타 솔라노와 기자였던 재닛 플래너.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할 기회를 얻어 파리로 왔다. 미국 중간 계급 여성들이 남성을 동반하지 않고 여행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던 시대였다. 그 둘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호텔이란 4층짜리 비좁은 호텔에 방 두 개를 잡았다. 솔리타는 그 방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일을 그만둔 뒤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돈이 없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호텔은 우리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방값이 하루에 1달러였고 센 강과 루브르 박물관 근처였으며 버스 정류장도 가까웠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시설은 별로였기 때문에 나중에 우리가 만들어 넣었다.(중략) 꼭대기 층은 모든 투숙객에게 정말 중요했는데 20호실 옆에 호텔에서 하나뿐인 욕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조도 변변한 의자도 없었다.(중략) 여러모로, 우리에게 이상적인 호텔이었다. 번거로운 집안일을 할 필요가 없었고, 간섭받지 않고 일과 연구를 할 수 있었으며, 온갖 즐거움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었다.'
- 안드레아 와이즈, <파리는 여자였다> 중에서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호텔이야말로 이야기가 탄생하기에 좋은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성 작가들에게는 더 그렇다. '자기만의 방'은커녕 집에 자신의 책상을 들일 공간도, 시간도, 인식도, 따라주지 않던 시대에 호텔이 그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꼭 넉넉한 숙박비가 있어야 호텔에 묵을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쓸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나섰고 솔리타처럼 없는 것들은 만들어서 채웠다.
호텔은 뿌리내리는 곳이 아니다. 새로운 자신을 찾아,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이들이 드나드는 곳. 낯선 땅에서 불빛을 밝히며 이야기가 쓰이는 곳. 호텔은 삶이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머물다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소다. 그곳의 불빛을 밝히는 사람들 중 누군가에 의해 세계 곳곳에서 마법이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