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힘들어도
글쓰기와 글 쓰는 '일'은 다른 것일까.
글쓰기는 혼자서 할 수 있지만, 글 쓰는 일은 여러 사람들과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혼자 글 쓰는 일도 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책이 나온다 해도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수고를 빼놓을 수는 없다. '방송작가'라고 하면 노트북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을 떠올릴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다. 자료조사, 취재, 섭외, 미팅은 물론, 몇 날 몇 일을 촬영본과 씨름한다. 다른 분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적어도 다큐멘터리는 그렇다. 이 일들은 결국 글쓰기로 수렴된다. 내레이션 원고를 쓰기 위해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놓치면 제대로 된 글을 쓰기가 어렵다.
여느 일들과 마찬가지로 방송 일 역시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섭외 거절은 일도 아니다. 작가들끼리 모이면 섭외 무용담들이 넘쳐난다. 촬영을 위해 노숙자 주변에서 머뭇거리고, 분주한 경찰서나 검찰청 같은 곳에서 투명인간처럼 대기하며 애태우기도 한다. 유명인들을 섭외할 때는 직접 찾아가야 하기도 하는데, 만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섭외가 해결되었는가 싶으면, 출연자가 또 사정이 생겼다는 전화가 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아무 소식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일도 있다. 구성 회의를 할 때도 PD와 의견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편집할 때도 서로의 생각이 달라 다투기도 한다.
"작가면 PD와는 베스트 프렌드 아닌가요?"
종종 받는 질문 중 하나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보이는 작가와 PD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의견 조정을 잘해서, 그러니까 잘 싸우면서 좋은 결과물을 내는 팀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많은 과정 중에서 의견이 같고 막힘이 없다면 그게 잘 되는 일일까.
어떤 일이든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해를 거듭하면 좀 나아지는가 싶어도 또 새로운 문제가 찾아온다. 선배들을 붙들고 의견을 묻고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뾰족한 답을 구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요즘엔 어느 편인가 하면 여기저기 떠들기보다는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지켜보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의 행동에 대한 결과가 보이고 그것들이 쌓여서 오는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있다. 그걸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일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작업 과정도 궁금하다. 분야는 달라도 어떤 것들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상통하는 것들이 있다. 당장의 문제에 해답을 주지는 않을지는 몰라도, 일이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책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가장 좋아하지만 <12인의 성난 사람들>, <네트워크>, <개 같은 날의 오후>,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등 하나같이 좋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을 때, 객석의 영화인들처럼 나도 일어서고 싶었다. 좋아하는 창작자들은 많다 해도 그들 모두에게 질문하고 싶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드니 루멧은 작업에 대해 듣고 싶은 사람 중 하나다. 영화가 유명하다 해도 작업 과정이 알려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그가 책을 썼다.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에게 편지라도 쓰는 것처럼. 그것도 영화 만드는 일에 대한 책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책은 선물과도 같다고 했다. 그의 코멘트는 이렇다. "만일 모든 감독들이 이렇게 자신의 작업 과정을 다른 공상가들과 공유했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거장 감독의 발끝이나 따라갈 수는 없어도, 그의 통찰을 엿볼 수는 있다는 기대감으로 펼친 그의 책은 흥미로웠다.
솔직함.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필터 없이 내뱉는 것이 솔직하다고 믿는 어이없는 사람들이 난무하는 세상에 솔직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시드니 루멧이다. 직관과 경험, 스스로에 대한 가차 없음. 위트 넘치는 유머.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문장에 녹아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일이 힘들 때 위로를 준 그의 경험담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영화가 잘 만들어지려면 감독이나 작가가 의도하지 못한 '제3의 의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자주 생기지 않는다. 일류 영화가 자주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멋진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직감한다. 앞에서 나는 영화가 스스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도 생각지 못했던 제3의 의미를 갖게 되는 때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 중에서, 시드니 루멧
모든 작업에는 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창작자들은 의도를 따라가지만, 동시에 의도에 매여있으면 안 된다. 온갖 예상치 못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좋은 작품에는 분명히 의도하지 못했던 의미가 나타나게 된다. 시드니 루멧은 이것을 '가끔 벌어지는 멋진 일'이라고 했다. 영화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무언가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는, 기획의도대로 갔을 때가 아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의 과정 속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어떤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은 대개 예상되거나 계획된 것이 아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 일이 그것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자리를 잡으면서 의미를 획득한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안다. 그 신비함을.
그 책을 읽었다고 해서 당장 일에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측불허의 일들이 수없이 벌어질 때 조금은 느슨해질 수 있는 여유를 배웠다. 어쩌면, 이 혼돈 속에서 내가 몰랐던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스트레스가 덜해진다. 거장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걸작이 만들어지는 비결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고. 시드니 루멧의 고백은 이렇다.
"일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조합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어떤 감독은 일류 영화를 만들고 다른 감독은 죽을 때까지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류 영화를 가능케 하는 '요행'을 위해 토대를 부지런히 닦아 두는 것밖에 없다. 좋은 작품이 탄생할지 아닐지는 우리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의 자리에 각자의 일을 대입해도 통하는 말일 것이다.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일이 힘들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가 없다. 창조가 이루어지는 섭리가 그렇듯이 멋진 일은 혼돈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
시드니 루멧이 들려준 여러 가지 경험담들이 흥미로웠지만, 가장 소리 내어 웃은 문장은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웃게 될 것 같다.
우리가 러시 상영에 참석해서 어제 찍은 영상들을 보며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이것이다.
"잘했어. 우린 모두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군."